KAI노조 지금이 파업할 때인가
KAI노조 지금이 파업할 때인가
  • 문병기
  • 승인 2020.08.0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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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기(서부취재본부장)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중하고 시급한 일이라도 때와 장소, 가능성을 신중히 가려서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KAI노동조합이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들을 보면, 이 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듯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KAI노동조합은 최근 임단협에 돌입했다. 매년 하는 연례행사이지만 올해처럼 주목받은 경우도 별로 없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은 물론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그렇기에 임단협은 노조의 가장 핵심이고 당연한 권리 행사 중 하나이다.

이번 임단협에서 노조는 기본급 인상은 조건부 동결했다. 대신 제도 개선과 후생·복지 분야에서는 새로운 요구안을 사측에 제시했다. 2019년 이후 입사자 연차제도 복원과 임금피크제 폐지, 정년 연장을 요구했다. 또한 주거안정자금 6000만 원에서 1억 원 인상과 이자 지원, 우리사주 매입 자금 연간 100만 원과 본인 및 부양가족 의료비 100% 지원, 출산 축하금 100만 원과 자녀 초·중·고 입학 및 졸업 시 각 50만 원 지원을 요구하며 협상을 벌이고 있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 요구안은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다. KAI처럼 수조원의 실적과 수천억 원의 영업 이익을 내는 잘나가는 기업이라면 이보다 더한 요구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KAI노조는 이번 임단협 역시 과거를 답습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공약이나 상급단체 지침, 조합원 설문 등을 거쳐 임단협 요구안을 만들었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사측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KAI노조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현재 우리나라 항공 산업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KAI가 있는 사천의 항공 관련 산업들은 고사 직전에 있다. 보잉737맥스의 잇따른 추락사고에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일감이 바닥나자, 조업을 단축하거나 공장 문을 닫고 있다. 근로자들은 정들었던 직장을 떠나 실직상태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경남도와 도의회, 사천시와 시의회는 물론 도내 상공회의소와 도민들이 나섰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대책을 호소하고, 정부나 지자체는 각종 지원책으로 위기에 빠진 항공 기업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언제 이 상황이 끝날 지도 장담할 수 없고, 언제 일감이 넘쳐 공장에서 기계소리가 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고, 이것이 KAI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천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KAI노조에게는 딴 나라 얘기나 다름이 없다. 이런 시기에 임단협을 통해 무리한 요구를 하고, 들어주지 않는다고 파업 운운하며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남이야 어찌됐던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발상에 누가 박수치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지금처럼 항공 산업이 위기에 빠졌을 때도, 방산비리와 마린온 추락으로 KAI의 존립이 흔들릴 때도, 항공MRO사업이 타 지역에 빼앗길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일 때도 KAI노조는 없었다. 정작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이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침묵하며 방관했고,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으로 나선 것은 경남도와 사천시, 도·시의회와 상공회의소, 그리고 시민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뻔뻔함과 부끄럼조차 없는 KAI노조에 실망감을 넘어 분개하고 있다. 지금 노조에게 시급한 현안은 임단협 투쟁이 아니라, 뼈를 깎는 심정으로 고통분담과 정상화에 앞장서는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문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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