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38) 초오유 여신, 남동벽 모든 것을 앗아가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38) 초오유 여신, 남동벽 모든 것을 앗아가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9.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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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연맹, 11년 만에 재도전…7700m 지점서 포기
3캠프 눈사태 셰르파 3명 사망·2차 눈사태 이어져
 
2캠프 구간으로 가는 도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권오문 등반대장(왼쪽)과 서길석 부대장.
“1989년 안타깝게 실패한 초오유 남동벽을 11년 만에 다시 찾았다. 그러나 눈사태로 인해 두 번의 도전은 모두 아쉽게 끝이 났다.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시 숨진 3명의 셰르파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싶다.”-강덕문 원정대장.

진주시산악연맹, 초오유 남동벽 신루트 도전

경남산악연맹 진주시연맹(회장 이병윤)은 2000년 가을 초오유 남동벽에 도전장을 던졌다. 초오유 남동벽은 1985년 폴란드의 전설적인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가 초등했다. 한국은 초오유 원정에서 많은 등정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대부분 노멀루트인 서릉~서벽을 통한 등정이었다. 경남은 1989년 초오유 남동벽에 한국 원정사상 최초로 겨울철 등반에 나섰다. 그러나 7800m 지점에서 눈사태에 셰르파 1명이 희생되면서 등반을 중단했다. 당시 강덕문은 부대장으로 참여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지만 등정에 실패했다. 그는 11년 만에 다시 초오유를 찾았다.

이병윤 단장을 중심으로 조병희 부단장·강덕문 원정대장·최근하 부대장·권오문 등반대장·오두환(식량)·서길석(행정·기록)·정상규(장비)·강연룡(촬영·수송)·조현일(촬영·포장)·김무진(기록·장비)·조광래(식량·포장)·김정근(촬영)·김석창(보도) 대원이 참여했다.

 
초오유 남동벽과 주변 산군들-사진 출처 HIMALAYA 8000×14
8월 마지막 날 베이스캠프 입성

8월 17일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다음 날 원정 대행사 사무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원정에 참여하기로 한 셰르파 2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행사는 부랴부랴 그들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 결과 1988년 대한산악연맹 캉첸중가 원정에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급한 장비비만 챙기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결국 셰르파 3명을 고용했다. 8월 22일 버스와 헬기를 이용해 샹보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1주일 카라반을 시작했다. 고쿄(4800m)를 지날 무렵 대원들이 고소 증세로 대원들은 하루 휴식했다. 8월 마지막 날 해발 5300m에 BC를 설치했다. 대전쟈일클럽도 초오유 남동벽을 오르기 위해 도착했다. 원정대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9월 4일 라마제를 올린 후 강덕문·권오문·조현일·니마 셰르파가 1캠프 루트 작업을 나섰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눈을 맞으며 거대한 빙탑을 가로질렀다. 퇴석지대를 지나 2시간 정도 걸어 눈이 굴러떨어지는 계곡 윗부분까지 로프를 설치한 후 BC로 하산했다. 대전쟈일클럽팀은 루트 작업에 나섰고, 경남연맹은 짐 수송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헬기로 짐을 수송하는 모습.
카트만두에서 히말라야 등반 기록의 어머니인 홀리 여사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대전쟈일클럽과 루트 개척

9월 6일 권오문·김무진은 셰르파와 함께 폭설을 맞으며 600m 고정 로프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다음 날 최근하·정상규·조현일·조광래 대원이 1캠프(6100m)를 건설했다. 9월 9일 대전팀은 루트 작업을 시작했으며 경남팀은 1캠프에서 대기했다.

다음 날 대원들은 2·3캠프에서 사용할 짐을 수송하고, 1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2캠프 작업을 지원했다. 몬순이 시작되면서 비가 자주 내렸다. 높은 곳에는 진눈깨비가 폭설로 변했다. 추석을 앞두고 대원들은 3캠프(7300m) 구축에 안간힘을 썼다. 대전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부작용이 일어났다. 바로 식량 문제였다. 10명이 넘는 대원이 머물다 보니 힘들게 올린 식량은 금방 바닥이 났다. 결국 꼭 필요한 대원만 남기고 가능하면 BC로 하산했다.

9월 10일 2캠프를 건설한 후 추석(12일)을 앞두고 전 대원이 BC에 모였다. 마침 K2 등정을 마치고 강연룡 대원이 합류했다. 그는 가셔브롬4봉(7925m) 북서릉 세계 2등, K2 남남동릉 한국 초등하면서 거벽 등반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K2 등반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소 적응이 충분히 되어 있는 만큼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4캠프 건설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경남·대전 합동대는 ‘초오유 동벽 10일 작전’을 내놓았다. 9월 14~23일 10일간 3~4캠프를 구축하고 곧 바로 정상 공격을 시도한다는 작전이었다. 많은 비가 내려 눈사태 발생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많은 인원이 캠프를 오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컨디션이 좋은 대원들을 선발해 속전속결로 등정을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원정대원
눈사태, 사라진 3명의 셰르파

9월 14일 강연룡·조광래 대원과 셰르파가 2캠프로, 권오문 등반대장과 대전팀은 1캠프로 이동했다. 아쉽게도 15일 폭설이 내려 등반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9월 20일 원정대는 정상 공격에 나섰다. 강연룡 대원과 대전 차명관 대원, 그리고 셰르파 등 12명이 나섰다. 그들은 신속하게 3캠프로 향했다. 낮 12시가 넘자 뜨거운 햇살이 빠르게 눈을 녹이고 있었다. 오후 2시 30분 3캠프에 도착한 대원들은 안전한 곳에 텐트를 설치하는 순간이었다. ‘쿠웅!’하는 굉음이 울렸다.

대원들은 순식간에 눈사태라는 것을 직감했다. 3캠프 위에 있는 세락(Serac 탑 모양의 얼음)이 무너지면서 모든 것을 쓸고 내려갔다. 텐트·장비·식량, 고정 로프까지도. 잠시 후 후폭풍이 몰아쳤다. 셰르파 3명이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폭풍에 휩쓸리지 않은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뛰다시피 빙벽을 내려왔다. 장비도 없이 피켈과 손으로 구조작업을 벌였다. 오후 4시쯤 수색 도중 무전기가 든 배낭을 찾아 2캠프에 지원을 요청했다. 2캠프에 있던 모든 대원들이 도착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날 밤 8시 전 대원과 셰르파는 BC로 하산했다. 모두가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등반은 중단됐다.

다시 4캠프로!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장비를 구입, 등반을 준비했다. 그러나 셰르파들이 반대했다. 더 이상 등반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다행히 셰르파를 이끌고 있는 니마 셰르파가 나서 설득했다. 그의 도움으로 다른 셰르파들도 등반하기로 했다.

10월 5일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등반 도중 셰르파들은 동요했다. 셰르파들은 니마를 원망했다. 니마는 완강했다. “한국원정대와 셰르파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마음대로 해라. 난 혼자라도 올라가겠다.”

셰르파들은 3캠프에서 거의 등반을 하지 않았다. 강연룡·김무진, 대전팀 심창수 대원이 나서 4캠프 고정 로프를 설치했다. 대원들은 2캠프에서 휴식을 취했다. BC에서는 유족들의 항변이 이어지는 등 소란스러웠다. 10월 11일 2캠프에서 니마 셰르파와 강연룡·김무진·심창수 대원이 정상 공격을 감행했다. 권오문 등반대장과 조광래·대전 연헌모 등반대장 등은 2캠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5시간 만에 3캠프에 도착한 대원들은 오후에 휴식을 취했다. 대원 1명이 구토 증세로 하산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저녁 9시 30분 3캠프를 떠났다. 4캠프 예정지에 도착하면 간단한 장비만 챙겨 정상을 갔다 온 후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었다. 강연룡은 무전을 보냈다. “공격조 컨디션이 좋다.” 해발 7700m 지점에 다다르자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2차 눈사태에 당하다

강연룡과 니마는 순간 당황했다. 많은 눈이 내리면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신설이 내리면서 경사가 심한 구간에는 눈사태가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공격조는 일단 3캠프로 하산했다. 밤 11시 10분쯤 강연룡과 니마 셰르파는 3주 전 발생했던 눈사태 지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처마가 무너지면서 눈사태가 일어났다. 강연룡과 니마는 옆으로 몸을 피했다. 김무진 대원은 얼음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그는 기어서 필사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제일 먼저 탈출한 니마 셰르파는 뒤를 돌아봤다. 대원들이 보이지 않자 소리쳐 재빨리 피신시켰다. 겨우 눈사태 지역을 벗어난 3명은 다음날 새벽 2시 빈 몸으로 2캠프로 하산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만 건져 탈출한 것이다.

원정대는 두 번의 눈사태로 3명의 셰르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또다시 3명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정상 공격을 위한 모든 장비와 식량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원정을 결국 포기했다.

 
눈사태로 힘겹게 돌아온 대원들을 베이스캠프에서 맞아주고 있다.
변치 않는 우정

경남은 두 번에 걸친 초오유 남동벽 원정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8000m 신루트 개척을 위한 열정적인 도전이었다. 원정대는 헌신적으로 노력한 니마 셰르파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니마는 당시 원정을 계기로 2002년 진주산악연맹이 추진한 초오유 원정에 참여해 3명의 대원들과 함께 정상을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니마 셰르파는 경남산악연맹이 추진하는 각종 원정이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등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2002년 진주를 방문했다.

니마 셰르파는 말했다. “초오유 남동벽은 네팔 셰르파들도 두려워할 정도로 위험한 코스다. 경남 산악인들은 위험한 루트를 정말 용감하게 등반했다. 셰르파들은 대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등반하는 것이 의무이자 역할이다. 당시 우리는 셰르파 3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고용된 우리 셰르파들은 계약한 이상 마지막까지 정상 등정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셰르파의 오랜 전통이다.”

강연룡 대원은 당시 목숨을 잃은 셰르파 가족들에게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지원했다. 무려 18년간….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초오유 등반대 팸플릿
[취지문]
1950년 안나푸르나1봉이 초등정되면서 히말라야 8000m급 초등정 시대가 서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10년간은 서구 열강들이 국력을 앞세워 14좌를 모두 초등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디레티시마를 추구한 세계의 강력한 클라이머들로 인해 거벽 등반시대로 발전되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진취적인 등반가들에 의해 8000m급이 모두 등정되었고, 그 중 경남의 클라이머들은 거벽 등반을 통한 한국 초등정을 이룩하면서 국내 산악계를 이끌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국 산악사의 한 페이지를 또다시 쓰기 위해 한국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로 8000m 신루트 개척 등반이라는 명제를 안고 초오유(8201m)의 동벽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여기에는 집념이 있는 산악인들이 있습니다.

세계 초등을 한다 함은 미지의 루트에 어떠한 위험의 난제가 닥쳐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모든 대원의 피나는 훈련과 불굴의 투지만이 극복할 수 있다 하여 실천해 왔습니다. 이처럼 집념을 가진 선후배 산악인들과 항상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진주시민 여러분이 있었기에 이제 장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빛나는 등반, 후회없는 원정을 하고 오겠다고 머리 숙여 약속드리면서 그간 원정준비에 도움을 주신 많은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00년 8월 원정대장 강덕문

 
카라반을 하면서 대원들이 단체 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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