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의 약속 그리고 어느덧 가을
아들과의 약속 그리고 어느덧 가을
  • 경남일보
  • 승인 2020.09.23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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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경남도청 서부정책과 주무관)
지난 주말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가을정취를 물씬 풍겼다. 코스모스는 바람에 한들거리고 들판의 벼들은 노란 빛깔로 익어가며, 벌어진 밤송이 사이로 보이는 반질한 밤 알맹이들은 정다운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지루한 장마와 무더위로 숨 막혔던 여름이 언제 있었냐는 듯, 며칠사이 가을은 거짓말같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있었다.

청명한 하늘,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계절이다. 6살 난 아들 녀석도 계절의 분위기를 아는 것인지 산책을 하다 대뜸 이야기한다. “아빠랑 키즈카페도 가고 싶고, 목욕탕도 가고 싶어. 음.. 또 비행기타고 제주도도 가보고 싶어” 아들의 말에 내심 뜨끔하며 “봄이 오면 비행기타고 우리 가족 여행 가자”고 했던 작년 연말의 약속을 떠올렸다.

코로나로 인해 가족여행은 언제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요원한 일이 되었지만, 만약 코로나가 없었다면 나는 과연 그 약속을 지켰을까 생각해보았다. 사무실 업무와 각종 핑계를 들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좋은 계절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을 갖게 되는 건, 곧 추워질 것이며 추워지면 또 한해가 간다는 의식의 흐름 때문이 아닐까. 새해가 되면 늘 하던 다짐과 계획들이 지금 시기쯤엔 흐지부지 되고 기억만 어렴풋이 날 뿐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인지라 지키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다.

좋은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기 마련이다. 요즈음 더욱 짧아진 봄과 가을은 머물지 않고 바로 가는 듯하고, 엄마 아빠가 제일 좋다던 자녀들은 조금 더 크면 친구를 더 찾을 것이고, 방황하던 청춘들은 자기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버린다. 언제나 그렇듯 지난 후에 과거를 추억한다. 어쩌면 6살, 2살 아들딸과 함께 커가는 지금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 아닐까? 이런저런 핑계로 자녀와의 약속을 미루다 보면 이 짧은 시간들은 훌쩍 지나가 버리고, 시기를 놓친 나에게는 아쉬움만 남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라는 영화 속 한 대사가 생각난다. 얼마 남지 않은 가을과 몇 장 남지 않은 달력을 쳐다보며 또 한 번 다짐한다. 지금이라도 생각만 해놓고 아직 하지 않은 일들을 챙겨 봐야겠다고. 특히 비행기 타고 여행 가자던 아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박주영/경남도청 서부정책과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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