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9) 47살, 히말라야에서 하얀 꿈을 이루다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39) 47살, 히말라야에서 하얀 꿈을 이루다
  • 경남일보
  • 승인 2020.09.2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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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살 첫 도전, 히말라야에서 하얀 꿈을 이루다
진주고 45회 동창회…세계 6위봉 초오유에 도전
정상에 선 백승규 원정대장(왼쪽), 정상에서 태극기와 피켈을 들고 있는 강덕문 등반대장(가운데), 정상에 선 정장근 대원(오른쪽)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큰 결심을 하게 됐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아마추어기 때문에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한발 한발 오르며 최선을 다했다.”-백승규 원정대장.

월드컵이 열리는 해인 2002년 3월 30일 진주고등학교 45회 동창회가 세계 6위봉 초오유 등정에 나섰다. 경남에서 고등학교 단위에서 8000m 등반을 나선 것은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백승규 대장을 비롯해 이재현 부대장·정찬효·정장근 대원은 모두 진주고 45회 동기들이었다. 여기에 강덕문 등반대장과 박명환 대원이 참여했다. 원정대가 목표한 산은 티베트 초오유(8201m)였다.

친구들 십시일반 경비 지원…히말라야로

이들의 도전은 어떻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주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내 산행 경험은 많았지만 히말라야는 가본 적이 없는 순수한 아마추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원정 계획을 세운 후 1년간 국내 산에서 암벽 훈련과 하중 훈련 등 각종 훈련을 소화했다. 말레이시아 키나발루(4101m),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를 오르며 고소에 대한 적응도 모두 마쳤다. 국내·외 훈련을 마친 그들의 열정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도 오를 기세였다.

이들의 용감한 도전에 친구들이 동참했다. 원정에 필요한 1억 원이 넘는 막대한 경비 가운데 절반이 넘는 금액을 진주고등학교 45회 동기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후원했다. 기존 원정대는 기업이나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지원받았다. 그러나 이번 등반은 동창회에서 후원회를 조직해 상당 부분의 경비를 마련했다. 원정대는 2002년 3월 20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발대식을 갖고 3월 30일 네팔로 향했다.

 
 

네팔 정부군 vs 마오이스트 교전…정치적 불안

다음 날 새벽 2시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네팔은 공산당(마오이스트)가 정부군과 교전을 벌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국내 상황이 불안정했다. 특히 마오이스트들은 4월 2~7일 카트만두를 비롯해 전국에서 총파업을 주도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원정대는 서둘러 티베트로 향했다. 당시 네팔 공산당은 “외국인들에게는 절대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는 필요한 장비와 식량 등 총 2500㎏을 구입했다. 등반을 지원할 셰르파 4명을 고용했다. 셰르파 가운데 2000년 초오유 남동벽 등반 때 헌신적으로 노력한 니마 셰르파도 있었다. 강덕문 등반대장이 특별히 고용했다. 원정대는 4월 1일 카트만두를 떠났다.

4월 2일 네팔과 티베트 국경지대에 위치한 장무에 도착, 중국 정부로부터 원정에 필요한 장비와 식량 통관 절차를 마쳤다.

티베트에서 만난 경남 산악인들…감격의 포옹

중국등산협회 차량으로 장비 등을 옮겨 싣고 우의공로를 따라 니알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세계 14위봉 시샤팡마 남서벽에 신루트 개척을 위해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이 있었다. 도로공사 산악팀에는 진주에 거주하는 강연룡·박정헌, 그리고 유순욱 대원이 있었다. 이역만리 티베트에서 진주시민 9명이 모여 함께 술을 마셨다. 모두 무사하게 등반하자고 약속했다. 다음 날 시샤팡마팀은 결전의 땅으로 출발했다.

4월 5일 원정대는 차량으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전진 캠프(5700m)까지 야크로 짐을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중국등산협회는 야크 1마리에 수송할 수 있는 무게를 60㎏에서 40㎏이라고 했다. 지난 겨울 추운 날씨로 야크가 제대로 먹지 못해 60㎏은 수송이 불가능하다며 돈을 더 요구했다. 완강한 그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2100 달러를 추가로 지불했다. 200만원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야크를 핑계로 웃돈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폭풍설 뚫고 전진 캠프 도착

원정대는 고소 적응을 위해 중간 캠프(5300m)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4월 9일 전진 캠프로 향했다. 그러나 전진캠프로 가는 길은 강한 바람과 폭설로 처음부터 고전했다. 원정대는 이틀간 휴식을 취하고 안전한 등반과 등정을 기원하는 라마제를 지냈다. 4월 12일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대원들은 고소 적응과 체력을 아끼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1캠프로 전진했다. 이날 오후 늦게 해발 6500m에 1캠프를 설치했다. 대원들은 전진 캠프와 1캠프에 식량과 장비를 수송하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4월 18일 2캠프(7200m)를, 4월 25일 3캠프(7500m)를 건설해 정상 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원정대는 스위스팀으로부터 일기예보를 전달받았다. 4월 26일 오전 맑은 날씨를 보이다가 오후부터 눈이 내리고 4월 27일부터 이틀간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고 했다. 일기예보에 따라 출발을 앞당겨 날씨가 나빠지기 전에 3캠프로 돌아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1차 정상 공격조로 정찬효 대원과 강덕문 등반대장이 뽑혔다. 정찬효 대원은 이번 원정에서 고소에 가장 잘 적응하며 단숨에 정상에 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2캠프로 향하고 있는 이재현 대원.

정찬효·강덕문 정상 공격…강풍에 고립

4월 25일 오후 5시 해발 7500m 3캠프. 정찬효·강덕문 대원은 저녁을 준비했다. 알파미(고소용 밥: 쪄서 말린 쌀로 따뜻한 물을 부으면 먹을 수 있음)에 물을 부어 죽처럼 끓여 마셨다. 텐트 밖을 바라본 공격조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찬효 대원은 회상했다. “3캠프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구름이 약간 낀 맑은 날씨였다. 바람이 여느 때와 달리 티베트 방향에서 불어오지 않고 반대 방향에서 불어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따뜻한 침낭에 몸을 맡겼다. 새벽에 정상으로 간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들이 뒤척이는 동안 복병이 다가왔다. 오후 5시가 넘어서면서 강력한 바람이 초오유를 휩쓸고 지나갔다. 금방 멈출 것 같은 강풍은 더 거세졌다. 오후 7시가 되자 텐트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바람 소리가 거칠어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강력해졌다. 텐트를 금방이라도 날려버릴 것 같았다. 공격조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텐트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공격조는 텐트를 점검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강한 바람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곧바로 돌아온 그들은 몸으로 흔들거리는 텐트를 움켜잡았다. 강덕문 대장은 회고했다. “정상 등정이라는 부푼 꿈보다는 과연 여기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힘겨운 탈출

바람은 더욱 강해져 텐트를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였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는 방향으로 앉아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눌렀다. 3캠프는 바위가 많은 곳에 설치하면서 스노우 바 1개로 고정했고 나머지는 돌로 고정했다. 과연 돌이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시간은 더디게 가고 있었다. 몇 시간째 텐트를 붙잡고 있던 그들은 지쳐갔다. 강한 바람에 움직이지도 못했다. 길고도 긴 어둠이 걷혔다. 오지 않을 것 같은 4월 26일 아침이 밝았다. 어둠의 공포는 벗어났지만 사나운 바람은 그대로였다. 밤새 텐트를 지탱하느라 몸은 만신창이었다. 그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강한 바람은 그들을 다시 텐트로 몰아넣었다. 백승규 원정대장은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명령했다. “정상 부근 바람이 시속 150㎞가 넘는다. 텐트가 견딜 수 없다. 빨리 탈출해라!”

4월 26일 오전 10시가 지나자 바람이 잠잠해졌다. 정찬효·강덕문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은 몸만 잽싸게 빠져나왔다. 2시간 만에 2캠프로 돌아왔다. 2캠프에는 백승규·이재현·정장근 대원이 있었다. 그들 역시 강한 바람과 화이트 아웃으로 퇴로가 막혀 발이 묶여 있었다. 2캠프는 대원과 셰르파로 만원이었다. 공간이 부족해지자 기존에 남아 있던 3명의 대원은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악천후를 뚫고 하산하기로 했다. 이재현 대원은 당시를 설명했다. “2캠프에 있던 대원들도 힘들게 버텼지만 3캠프에서 내려온 대원들을 위해 우리가 내려가야 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대원들이 있어 누군가가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정찬효 대원(제일 뒤쪽)이 3캠프를 향해 오르고 있다.

50시간에 걸친 하산…안도의 한숨

오후 1시 3명의 대원들은 눈보라와 강풍에 맞서 황급하게 하산을 시작했다. 고정 로프를 설치하지 않은 곳이 있어 자칫 잘못하면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크레바스를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전기를 놓고 하산하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급하게 내려오면서 텐트에 놓고 내려갔다. 전진캠프와 2캠프는 하산조와 연락이 되지 않아 가슴을 졸였다. 밤 10시 하산조는 9시간 만에 무사히 돌아왔다. 2캠프는 그날 밤 사투를 벌였다. 텐트는 바람 앞에 종이처럼 흩날렸다. 잠시 잦아들던 바람은 더욱 강해져 초오유를 강타했다. 다른 원정대 텐트가 하나둘 날아가기 시작했다. 정찬효·강덕문은 8㎜ 로프로 텐트를 고정시켰다. 그들은 바람에 맞서며 긴 하룻밤을 대비했다. 밤새 바람은 울부짖었다. 춤추는 텐트에서 그들은 몸을 맡기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4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눈은 날렸지만 바람은 잦아들었다. 배낭을 챙긴 1차 공격조는 1캠프로 내려왔다. 1캠프도 바람에 부서지고 날려가 엉망이었다. 텐트를 보수하고 식량과 장비를 안전하게 묶어놓은 후 전진캠프로 하산했다. 1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50시간의 사투 끝에 아무런 사고 없이 내려온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찬효 대원과 강덕문 대원은 후유증으로 3일 동안 앓아누웠다.

2차 공격…정장근, 백승규 등정

원정대는 강풍에 날아간 텐트와 장비를 점검하고 2차 공격을 수립했다. 2캠프에 있는 텐트를 3캠프로 옮기고, 전진캠프 텐트 1동을 1캠프에서 사용하기로 했다.

4월 30일부터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는 일기 예보가 나왔다. 원정대는 4월 30일 정장근 대원이, 그리고 하루 뒤인 5월 1일 백승규 원정대장이 전진캠프를 출발해 정상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강덕문 등반대장은 컨디션을 회복하면 곧바로 등정을 준비하는 비상 플랜도 마련했다. 정장근 대원은 셰르파 1명과 함께 1캠프로 향했다. 전날 내린 눈으로 전진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1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음 날 청빙지대와 크레바스를 무사히 지나 2캠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5월 2일 2캠프 텐트를 3캠프로 옮긴 정장근 대원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3일 새벽 3시 잠을 깼다. 누룽지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산소를 챙겼다. 처음 8000m 등반이었기 때문에 산소는 필수적이었다. 그는 새벽 5시 마지막 캠프를 떠났다. 정장근 대원은 그날을 기억했다. “저녁 일찍 잠을 잤다. 컨디션도 좋았다. 너무 추워 선 듯 텐트를 나서지 못했다. 용기를 내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바람 한 점 없었고 별이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정상으로 향했다.”

그는 지난번 설치한 고정 로프를 이용해 2시간에 걸쳐 록밴드를 힘겹게 넘어섰다. 다행히 정상으로 갈수록 눈은 많지 않았다. 록밴드의 푸석한 바위들을 지날 때는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전진캠프에서도 망원경으로 그를 지켜봤다. 그는 조심스럽게 정상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설원을 통과한 공격조는 정상 주변에 몰려온 구름에 의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초조하게 시계와 무전기만 바라보았다. 5월 3일 낮 12시 40분 무전이 날아왔다. “여기는 정상입니다! 정상에 섰습니다.” 간단하면서 확신에 찬 정장근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만세.” 전진 캠프에 있던 대원들이 환호했다. 정찬효 대원은 지시했다. “서둘지 말고 정상 사진을 찍어라. 시간은 충분하다. 천천히 안전하게 하산하기 바란다.”

그는 다시 무전을 보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그런데 아침에 먹은 누룽지만 먹어 배가 고프다.“며 여유를 보였다. 순간 전진 캠프에 있던 대원들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40대 후반 아마추어 산악인들이 8201m 세계 6위봉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이어 5월 4일 백승규 원정대장 역시 정상에 올랐으며 5월 5일에는 강덕문 등반대장이 등정, 6명의 대원 가운데 3명이 초오유 꼭대기에 섰다. 진주고 45회 출신은 아니지만 강덕문 등반대장은 1989년과 2000년 험난하기로 유명한 네팔에서 초오유 등반에 실패했다. 그러나 티베트 방향으로 등정에 성공해 히말라야 등반 23년 만에 8000m 정상에 서는 기쁨을 누렸다.

원정대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들은 하얀 산에 오르겠다는 꿈을 이루었다. 아마추어 산악인들은 첫 히말라야 원정에서 세계 6위봉 등정이라는 저력을 과시해 경남 산악인의 기개를 전국에 떨치는 쾌거를 이뤘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취지문]
산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산사람은 만들어진 산사람이 아니라 지금 오늘 이 순간도 만들어가는 산사람이기에 여러분 앞에 용기를 내 섰습니다.
히말라야 산군은 산사람 모두에게 동경의 대상입니다. 평범한 산사람에게 히말라야는 다른 사람의 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진사오산악회는 그런 산사람이 모였습니다.
그 산사람은 만들어진 산사람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도 만들어가고 있는 산사람이기에 그래도 여러분 앞에 용기를 내 섰습니다.
사실 히말라야에의 원정은 모든 것이 준비안된 평범한 사람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진사오산악회는 용기를 내고 뜻을 모아 지난 1년간 원정 준비를 해왔습니다.
원정준비를 하면서도 그야말로 부족함의 투성이였습니다.
그러나 4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열성과 투지 하나 만큼은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산을 좋아하는 여러분께 출발에 앞서 더 큰 산에 대한 열정과 포부를 우리보다 저 가져 주셨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2002 한국초오유 원정대’ 발대식이란 만남의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바쁘신 일정이지만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셔셔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산사람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2 한국초오유원정대 대장 백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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