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산사태
[경일춘추]산사태
  • 경남일보
  • 승인 2020.10.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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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란 수필가
 
 

 태풍으로 산사태가 났다. 친정어머니 산소 부근에 서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쓰러졌다. 어릴 적 여린 소나무가 어느새 큰 소나무가 되어 집채 덩이처럼 어마어마한 몸짓으로 이웃 논을 덮쳤다. 논 주인이 꼭두새벽부터 전화를 할 만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뿌리째 뽑힌 소나무는 유년의 풍경으로 투영되어온다. 시골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변변한 농기구도 없었던 어려웠던 시기였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새벽녘에 어머니와 큰오빠가 온몸이 흙물로 범벅이 된 채 기진하여 들어왔다. 한밤중에 논두렁이 터질까 봐 빗속을 뚫고 양지 논에 나갔던 게다. 이튿날 해가 돋았을 때 밤새 얽어 놓은 논두렁의 땜질은 간밤에 혼신의 힘으로 버텼던 두 모자의 땀방울이었다.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난 오라버니는 가족의 아픔이었다. 산사태에 양지 논이 떠내려갈까 봐 밤새도록 사투를 벌였던 열여섯 살 오라버니.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근심을 함께했던 훌륭한 동반자로 집안의 기둥이었다.

무덤 속에 편안히 누워있는 어머니를 가만히 불러본다. 어머니는 사내대장부였다. 산사태로 당황하지도 허둥대지도, 피해가 간 논 주인과도 얼굴 붉히지 않고 순리대로 수습할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호밋자루 쥐는 법도 몰라 울며불며 시작한 농사였다, 육십 년간 농사짓고 나니 이력이나 박사가 다 되었다고,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감회에 젖곤 했었다. 어머니는 만물박사였다.

어머니가 없는 빈집이다. 영정 사진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린다. 살아생전에는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집을 둘러보러 왔다. 누워 계시는 어머니가 훨훨 날아 올까마는 희망을 품었다. 당신이 좋아하시는 들꽃을 꺾어 항아리에 담아두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설렘으로.

어머니와 정을 끊는 것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고향 집에 자주 들르던 일도 멀어졌다. 깨끗하게 청소를 해두어도 들꽃을 꽂아 두었지만, 어머니는 다시 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은 몇 년째 이어졌다. 산소에 벌초를 끝내고 어머니의 마당에 웃자란 풀을 말끔히 벴다. 신발장 위 항아리에 마른 꽃을 거두어 내고 들꽃 몇 송이를 꽂는다. 어머니 기일이 돌아온다. 시월의 끝자락에 들국화 마른 향기를 맡으러 오실까.

새벽녘, 잠결에 듣는 반가운 소리다. 산사태가 난 나무는 지역 소재지 면사무소에 신고하면 처리해 준다고 그가 말한다. 명절 공휴일이 끝나면 빨리 알아봐야겠다. 듣기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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