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각으로 다시 떠오른 영원한 논개여
음각으로 다시 떠오른 영원한 논개여
  • 경남일보
  • 승인 2020.10.12 15: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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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구 (경남시조협회장)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성안의 백성들은 모두 참살 당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었다.

1625년(인조3년) 논개가 순절한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1651년(효종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이 의암사적비를 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무지막지한 그 사내를 끌어안고 뛰어 들었네/그 여자 옥가락지 남강 물에 흔들렸네//색 바랜 영정에 내리는 비/못 다한 말은 말라 있네//백 년을 네 번 건너 부표처럼 떠오른/그 여자 금동반지 촉석교로 돌아 왔네//유등에 더욱 선명한/오! 거룩한 이름이여’(졸작 ‘금동반지’ 전문)

진주에 가면 400년 전 조선시대 의기인 논개(1574~1593)를 만날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남강은 진주시를 관통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남강 의암에서 그날처럼 서서 촉석교(남강다리) 쪽을 바라보면 논개가 보인다. 논개의 금동 쌍가락지를 낀 다리 기둥들이 역사를 호위하며 무언의 말을 우리에게 전하는 듯하다. 어이 몇 문장의 말과 표현으로 오롯이 기록해낼 수 있을까. 꽃다운 나이로 떠난 논개와 술 한 잔 주고받는 중이다. 꿈결인가, 생시인가. 핏빛 술을 경건하게 받아 들고 시조 한 수로 음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 역사의 숨결을 마음으로 밟으며 거룩한 이름에게 간다. 가는 곳곳에 꽃이 피고, 별이 뜨고, 환한 달까지 차오르면, 역사와 문화의 진주에서 진한 느낌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무르익는다. 논개를 기리는 진주성에 꽃불 비가 물속에서 불야성을 이룬다. 촉석루 색 바랜 영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염원이 세상을 더 밝게 비췄으면 한다.

임성구 경남시조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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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환 2020-10-19 11:06:16
가락지가 맞는 표현이고 쌍가락지라는 표현은 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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