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인물과 조선어학회 사건
경남 인물과 조선어학회 사건
  • 경남일보
  • 승인 2020.10.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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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해마다 시월이면 한글을 생각한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이 있고, 일제강점기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시작된 달도 시월이었다. ‘오늘 국어를 사용했다가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었다.’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4학년 박영희의 일기장 한 문장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시작되고 일파만파 확대되어 갔다. 일본 경찰은 처음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걸 꾸중한 교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국어가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임을 알게 되고, 평소 조선어를 국어라고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교사를 추적했다. 수사한 결과, 그 사람이 한때 영생고등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상경해 우리말 사전 편찬을 하고 있던 정태진임이 밝혀졌다.

일경은 1942년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같은 해 10월 1일, 첫 번째로 최현배 등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다음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이 검거되어,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내가 이 사건에서 별도로 주목한 것은 이 33인 중에서 경남 지역의 출신 인물이 아홉 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경성(서울)과 13도를 포함한 열넷의 지역에서 한 지역의 인물이 27% 이상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에 연루된 33인 가운데서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이윤재·이극로·최현배인데 모두 경남 사람들이었다.

이윤재(김해)는 3·1운동 평안도 영변 만세 사건을 주도해 평양에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조선어학회 사건 때는 1942년 12월 8일 형무소에서 향년 54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이윤재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이극로(의령)와 최현배(울산)는 조선어학회를 주도한 실제적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재판부에 의해 가장 엄하게 선고되었다. 해방된 날 이틀 후에 석방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 군정청이 한글 전용 정책을 추진하게 움직였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분단된 북과 남에서 각각 한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원주민의 언어를 식민주의의 언어로 동화시키는 것을 두고 이른바 ‘언어침식’이라고 한다. 식민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민족정신과 민족어의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주의가 치장하고 있는 허울 좋은 미명, 즉 문화를 전파하고 문명을 보급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조선어학회의 경우처럼 언어침식에 대한 주된 저항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식민주의의 언어에 의한 침식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알제리이다. 알제리가 130년에 걸쳐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지만 여기에 프랑스어가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한마디로 말해 식민주의의 언어침식에 저항한 어문 민족주의의 발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33인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주의자가 아무도 없었다. 훗날 월북한 이극로조차 일본 재판부는 민족주의자로 보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조선어학회 사건 33인 중에는 경남 출신의 인물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국가 차원에서 선양하지 않는다면, 경남 지역에서 기념관을 세워 자라나는 성장 세대에게 귀감이 되게 해야 한다. 조선어학회 사건 기념관은 33인 중에서 세 사람을 배출한 의령, 이 사건의 상징적인 존재인 이윤재의 고향인 김해, 도민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창원 가운데 한 곳을 선정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이 되게 하면, 좋을 것이다.
 
송희복 (진주교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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