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1)종합예술축제 효시
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1)종합예술축제 효시
  • 김지원
  • 승인 2020.10.1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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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예술제 가장행렬 경남일보DB
개천예술제 가장행렬 경남일보DB

 

이토록 고요했던 개천절, 진주 사람들의 기억에선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을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10월 3일이면 단군 할아버지에 차례를 올리고 꽃을 바치고, 한편으로 임진왜란 전란의 희생자들을 기리며 민족혼을 꽃 피워온 진주였다. 우리나라 종합예술제의 효시로 이어온 70년 세월에, 난데없는 불청객이 찾아와 열달 째 눈치 없이 떠날 줄 모르니 결국 개천예술제 사상 세 번째 궐제를 맞고 말았다. 70회 라는 큰 역사를 한 해 미뤄두고 경남일보와 한국예총 진주지회는 69회 개천예술제를 돌아본다. 진주에서 태어난 최초의 종합예술제와 최초의 지역신문이라는 인연을 떼어놓고도 경남일보 주필을 역임하던 시절 축제를 창제한 설창수 선생과 경남일보 사람들이 함께 한 개천예술제와의 동행은 길고도 깊다. 함께 키워나갈 우리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 개천예술제의 내일, 희망을 다시 물어볼 시간이다. <편집자 주>

1951년 11월 2일자 경남일보 2면에는 설창수 선생이 쓴 제문 ‘영남예술제단에 봉헌’ 전문이 실려 있다. 그는 1949년 영남예술제 첫 회를 치르고 한 해 만에 한국전쟁으로 중단된 예술제를 다시 여는 다짐을 이렇게 풀어 놓았다. “독립기념 제2회 영남예술제는 싸우는 백성들이 함부러 노래하고 춤추어 유흥함이 아니라 오히려 싸우는 마음의 꽃다발과 봉화로써 단군님의 제단 앞에 후손의 득죄를 드리는 것.…전 세계에 보내는 문화민족 대한백성들의 폐허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합창인 것입니다.”

민족 간의 전쟁으로 온 나라가 세계의 주목을 받던 때였다. 진주는 전쟁 속에서 예술제라는 축제의 꽃을 기어이 피웠다. 세계적 통신사 UP와 AFP도 변방의 작은 도시 진주에서 벌어진 전쟁 속 예술제 취재를 위해 기자를 파견했다. 특히 2회 예술제부터 개최된 영화상영회는 내외신 기자들의 관심거리였다. 미공보원 USIS는 6일간 예술제 전모를 촬영해가기도 했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기어코 예술축제를 마련한 정신에 대해 60회 제전위원장을 맡았던 화가 조영실은 “정부 수립 후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감히 누가 이러한 축제를 발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겠는가. 조국을 사랑할 줄 알고 피를 흘려본 진주인들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임란 3대첩에 빛나는 진주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11월 6일자 예술제 폐막을 알리는 2면에는 “영남예술제 대성황리 폐막, 한국문화사에 신기록 수립”이라는 제목으로 본문활자를 키운 예술제 폐막 기사에 연이어 ‘진주 장정 소집령장 발부’라는 기사와 ‘서남지구 종군기자단 편성’이라는 기사를 나란히 실었다. 진주의 경남일보, 광주의 전남일보, 여수의 여수일보 등등이 종군기자단에 편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실로 전쟁 속 축제였다.

개천예술제는 시작부터가 극복과 도전이었다. 긴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민족 고유의 축제는 민족정기를 흩어 놓으려는 일제에 의해 말살되어 왔다. 동네마다 풍년과 풍어를, 안녕과 무사를 기원하는 고유의 축제 대동제를 열지 못하게 하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축제문화가 사라져갔다. 일본의 마쓰리가 오늘날도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남아있는 것에 비하면 안타까운 시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 후 1949년 정부수립 1주년의 자주독립을 기리는 예술제의 탄생은 종합예술제로서 첫 출발인 한 편, 민속 대동제의 재현으로서 가치를 부여해 볼 수 있다.

1949년 7월 부산에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경남지부가 탄생했다. 도청을 부산에 내주고 문화단체마저도 거리감을 느끼던 진주는 진주지구특별지부 인가를 받아 제1회 영남예술제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11월 22일(음력 10월 3일)의 일이었다. 설창수의 주도로 경남일보 직원들이 축제진행 부서에 배치됐다. 영남예술제는 1951년 2회를 치르고 9회까지 이름을 유지했다. 1959년 10회를 맞아 ‘개천예술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게 된다.

설창수는 창제 때부터 개천예술제라는 명칭을 염두에 두었다. ‘개천예술제 60년사’에서는 첫 회부터 개천예술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설창수는 처음부터 제전의 정신에 따라 개천예술제라 하고 싶었으나 당시 고문이었던 진주농과대학 황운성 학장의 제고 요청에 따라 ‘영남예술제’라는 겸양지덕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확정하였다.”

축제의 제단을 ‘개천제단’으로 한 것으로 보아도 애초에 설창수는 단군제단에 촛불을 밝히고 행사를 창제한 것이었으니 ‘개천예술제’의 명칭사용은 정상복귀의 뜻이나 다름없었다.

1960년 11회 개천예술제는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설창수 대회장 1인 중심이었던 대회가 박세제 준비위원장과 양두마차로 체제가 된 것이었다. 설창수의 참의원 진출로 인해 지역에서의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창수의 참의원 시절은 짧았다. 9개월 만에 5.16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참의원이 해체되고 문총 진주특별지부도 해산되어 그 해 12회 개천예술제는 재건국민운동촉지회가 주체가 되어 치러졌다. 이병문 군인시장이 대회장이 되고 동아일보 진주지사장이던 강천석이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군사정부 시절 개천예술제는 대통령의 대회 참석으로 축제의 위상을 높이는가 하면 행정스타일의 능률위주 운영을 보인 반면 단군 제의에 소홀하면서 창제정신에 맞지 않은 운영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13회 예술제는 개천송가, 독립의 노래, 분향헌작, 제문 봉독 등 ‘제의’의 순서가 삭제됐다. 참의원 해산 등 군사정부와 악연인 설창수는 이 즈음의 예술제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개천예술제’로 이름을 바꾼지 2회 만에 물러난 설창수의 신념 ‘단군성조에 바치는 제사’는 쉽게 힘을 잃었다. 아득히 먼 단군 보다는 임진년, 계사년의 호국 군관민에 대한 제의가 더 쉬운 지지를 받은 탓도 있겠다. 13회부터 32회까지 제의는 챙겨지지 않았고, 그나마 제단의식은 임진·계사년 순국영령에 대한 의식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맡았던 행사 주체는 한 해만에 새로 생긴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예총) 진주지부로 넘어갔다. 예술이 배고픈 것은 예나 오늘이나 다르지 않기에 축제의 살림걱정은 진주의 사업가들로부터 모금된 기금으로 재단설립에 이르렀다. 1972년 11월 8일 개천예술재단이 설립됐다. 개천예술재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재단으로 순수예술재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8년 29회 대회부터 개천예술재단 이사장이 당연직으로 개천예술제 운영위원장이 됐다. 대회 주관은 예총 진주지회가 맡았다. 공식적으로는 31회부터 56회까지를 개천예술재단이 주최한 대회로 본다. 2000년에는 이름을 진주문화예술재단으로 변경해 56회까지 개천예술제를 주최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면서 개천예술제는 사상 두번째 궐제를 맞았다. 당시 음력 개천절을 중심으로 행사를 치렀던 개천예술제는 행사에 임박한 상황에서 국상으로 대회가 취소됐다.

1983년 개천예술제는 경상남도종합예술제로 지정됐다. 이듬해인 34회 대회부터는 창제자 설창수가 제사장으로 복귀 했다. 이규호 경남지사, 김윤양 대회장, 최용호 예총 진주지부장 등의 설득이 22년간 개천예술제와 멀어졌던 설창수를 복귀시켰다. 이후 설창수는 1996년 46회 대회까지 제사장을 맡았다. 설창수의 빈자리는 지역 예술인들이 번갈아 메우면서 지난해로 69회 대회를 치렀다. 행사 주최는 57회 대회부터 한국예총 진주지회에서 다시 맡았다.

개천예술제는 문학, 미술, 음악, 연극, 국악, 무용, 사진, 웅변 등 예술분야 경연을 치르는 종합예술축제다. 공모전과 실기대회, 초대전 , 백일장 등 행사가 대회기간 열린다. 학생부 일반부 등의 참여범위도 넓다. 전문작가니 취미 작가니 하면서 사진전만 해도 3~4개가 겹쳐서 열리고, 분재전시, 지역특산품 실크전시도 개천예술제 이름을 걸고 열린다. 종합예술축제라 칭하는 이유다.

순수한 예술의 경연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개제식에 이어 열리는 가장행렬은 볼거리의 으뜸으로 삼는다. 인근지역에서도 이른 아침부터 길거리 보도블럭에 앉아 개천예술제 가장행렬을 기다릴 정도로 이름난 볼거리였다. 임진왜란 순국 장수와 논개부인, 만세운동 행렬 등 민족 긍지를 내세운 주제에 최근에는 마을 전설을 이야기로 풀어낸 가장행렬도 이어진다. 화려한 개막 전야의 불꽃놀이와 지금은 분리돼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유등축제 역시 개천예술제를 흥겹게 하는 구성요소다.

지역마다 동네마다 우후죽순 예술제가 생겨나고 장르별 전문축제가 각양각색으로 벌어지면서 전국적 명성은 차츰 사라져갔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회라는 명색도 초기의 반짝 몇해 였다. 개천예술제에서 수상했노라 하는 자랑도 빛이 많이 바랬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예술축제 개천예술제가 어느덧 70회를 앞두고 있다. 예술제 큰 형으로 아류의 축제들을 키워낸 밑바탕이 되었지만 수십년의 역사를 보면 지금의 개천예술제에 대한 인식은 아쉬움이 크다. 개천예술제의 한 행사로 시작했던 유등축제의 성장을 보면 더욱이 미안한 마음도 든다. 70회라는 큰 걸음을 앞두고 축제의 개최가 한 해 발목 잡혔다. 때마침 이라기엔 어색하지만, 이 최고 최대의 지역종합예술축제의 어제를 되돌아보고, 오늘은 반성해보며, 내일 희망을 써보기에 때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오늘 설창수의 한 편 시 같은 취지문을 다시 읽어보며 ‘인류 역사에 문화의 꽃이 피는’ 일흔번째 축제의 잔칫날을 미리 준비해보는 시리즈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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