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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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10.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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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교육계의 별 허만길 박사의 살아온 길(완)
허만길 박사가 진주에서의 4.19 관련 역사를 기술하기 전에 진주의 여러 채널을 통해 진주의 고유한 자료가 있는지 알아 보았으나 기념사업회 기타 자료들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4.19가 있던 1960년 6월 9일 진주에서는 시내 진주농림고등학교와 진주고등학교 간에 사소한 원인으로 양교간 이틀에 걸쳐 한 번씩 주고 받는 전면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이를 두고 필자가 다니던 진주고등학교 영어과 김모 선생님이 다음 날 수업에 들어오셔서 지난 6월 9일과 10일 이틀간 있었던 공방전을 두고 <6.9사태>라 불렀다. 지금까지 필자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6.9사태>라 불렀다.

이 6.9사태때 진주고와 진주농고가 진주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때 남쪽 포진의 진주고 전열을 헤집고 ‘4.19혁명학생위원회’라는 플래카드를 건 집차가 접근했다. 마이크를 통해 “학생 여러분! 전국에서 흘린 숭고한 학생들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고 있는 이때입니다. 양교 학생들은 자제해 주십시오”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성이 좀 빗나가긴 했지만 이 집차에게 들고 있었던 돌을 던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허박사의 4.19 관련 기념단체가 없었다는 말을 수정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진주에서의 6.9사태는 필자가 생각할 때 4.19 전후 진주지역에서의 역할이 이웃 도시에 비해 마음에 차지 않았던 데서 일어난 공허감의 표현이 아닐까, 이런 사회심리학적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한 것이라고 종종 느껴질 때가 있다.

허만길 박사는 2011년 이후 고향 의령과 관련하여 연구 논문과 평론, 시작품을 발표하고 또 노래를 제작하여 고향에 선사하였다. 의령노래 6곡의 가사를 짓고 작곡가에게 작곡을 의뢰하고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의령 아리랑>, <자굴산>, <금지샘 사랑> <한우산 철쭉꽃>, <의령을 위하여>, <칠곡 사람> 등이다. <의령 아리랑>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 다리랑/ 임이랑 손잡고 자골산 오르니/ 바위도 좋고요 나무도 좋고요/ 가슴이 쿵더쿵 꽃들도 좋다네/ 임이라 임이라 내 임이 최고라/ 아리다리랑 아리다리랑 의령 아리랑(전3절 중 1절) 허 박사는 2011년 7월에 <칠곡사랑>을 가곡 형태로 만들어 칠곡면을 사랑하는 모든 향토민들에게 선사했다. 그리고 <금지샘 사랑>을 가요로 제작하여 고향에 선물했다.

이뿐 아니라 허 박사는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진주의 비봉산을 가곡으로 만들어 작곡가 이종록 가곡 제39집 음반에 수록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비봉산 아래서 셋방을 옮겨가며 살았다. 아버지와 봉래초등학교 구내 이발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비가 내리면 밤새도록 하늘이 보이는 구멍 뚫린 양철지붕을 쳐다보며 물을 받아내기도 했다. 소프라노 최윤정씨와 바리톤 유지훈 씨의 <진주 비봉산> 노래는 유튜브에서 ‘허만길 진주비봉산’이라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

<진주 비봉산> 1절을 보자. “푸른 맘 주고받던/ 산마루 느티나무/ 산등성이 굽이따라/ 한들한들 청보리/ 맑은 미소 고운 꽃잎/ 꿈이 뛰놀았네/ 떠오르는 아침 안개/ 남강 위 춤을 추고/ 머나먼 인생 이상/ 다짐하며 정든 그대/ 그리운 비봉산 진주 비봉산”

허 박사는 고향 사랑 진주 사랑이 남다르다. 그것이 교육의 길로 들어선 자리가 진주사범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는 일찍이 최현배 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만한 포부로 우리말 우리글 운동이 국책사업의 초석이 되었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 자리 보존운동과 정신대 문제 관여와 작품화는 나라사랑의 외연을 넓혔고 4.19에 대한 지극한 관심으로 진주의 빈 공간을 채우고자 했고, 고향 사랑을 위한 노래말 보급으로 외지에서 살았던 세월을 수구초심 절절한 귀향의지를 드러내었다. 그것은 모두 하나로 나라사랑으로 귀결되는 민족 기질과 그 뿌리의 확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교적 늦게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요 소설가였지만 그 시인의 시와 소설가의 소설은 뿌리와 정신 찾기에 이바지한 면이 짙다. 그래서 하박사의 문학은 교시적(敎示的) 교훈적 기능에 강음부가 찍히는 것이리라.

필자는 끝에다 허박사의 모교에 <허만길 교육연구소>를 개설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해본다. 허박사는 어떤 일을 하면서도 교육 밖에 것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교사로서, 편수관으로서 장학사로서, 교장으로서 그는 그 천직 안에서 천직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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