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묻어둔 창고에서 한 줄기 빛이
슬픔을 묻어둔 창고에서 한 줄기 빛이
  • 경남일보
  • 승인 2020.11.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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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구 (경남시조시인협회장)
가을비가 추적추적 대지를 적시고, 산을 적시고, 가난한 이들의 가슴까지 적신다.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이 계곡물을 따라 흘러간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나뭇잎에게 물어본다. “이 많고 많은 산사의 나무들 속에 너의 어머니는 누구시니?”, 어머니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많이 아플까를 생각한다. 어머니의 손을 놓쳐버린 자식은 얼마나 슬플까? 가을이 깊어 감성도 깊어진다. 대수롭지 않은 것에도 쉽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나는 지금, 추억을 소환하는 가을 앓이 중이다.

‘덤불덤불 긁힌 자국/자갈 지나 찔레밭이다//엄마를 더듬다가/벙글며 벙글면서//하얗게/오월을 울리는/내 그리움의/가슴아//석 달 열흘 퍼 부은 빗물로도 다 못 채운//공병 같은 가슴아//공병 같은 노래야//어느 집/헛제삿밥 같은/이 허기진/그리움아’ (졸작 ‘환한 고립’ 전문)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 영혼의 창고를 개방한다. 한 번도 ‘어머니’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사진으로라도 본적이 없다. 단언컨데 내 생이 다 하는 그날까지도 나는 그 이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생이 다 해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산다. 만약 꿈속에서 만난다 하여도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많이 아플까 싶어 차마 물어보지 못하겠다. 그런 세월이 어느덧 쉰다섯 해를 향해 가고 있다.

왜 이럴까? 왜 이럴까? 오늘 쓰는 산문에 눈물이 흥건하다. 분명 첫 서두가 잘 못 됐다. 그러나 나를 들어내지 않고 가는 인생길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겨운 길이겠는가? 글을 쓰면서 내 영혼의 창고를 개방하였다.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는 글이 아니라 진솔하게 독자와 대화를 나누고 손을 내밀고 싶었다.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가는 길을 걷고 싶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온 능선에는 수만 가지의 꽃이 피었다. 벌과 나비들의 시간이 향기로움을 선물하였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온 능선에선 나무란 나무들이 푸르게 푸르게 성장해갔다. 푸른 잎잎들이 새들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도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여름에서 가을로 큰 걸음으로 뛰어온 지금은 알찬 열매로 와서 세상의 허기를 채운다. 알찬 열매를 수확해내고 붉게 붉게 물들면서 떨구는 잎의 쓸쓸함이 계곡물에 닿는다. 흘러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겨울을 생각한다. 겨울이 머지않았음을 알겠다. 겨울이 오면 차가운 네 손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오래된 비밀의 자물쇠를 풀고 그대를 더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 지상에서 가장 진솔한 빛이 되어 웃음을 주고 싶었다.
 
임성구/경남시조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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