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45) 다울라기리1봉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45) 다울라기리1봉
  • 경남일보
  • 승인 2020.11.0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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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산악부, 등반대장의 한(恨)을 풀다

2000년 원정, 눈사태에 등반대장 잃으며 원정 실패
경남산악연맹 히말라야 도전에서 첫 희생자 ‘충격’
5년 후 최임복, ‘이수호 대장’ 영정 품고 정상 올라
원정대원들이 원정을 떠나기 전 고 이수호 등반대장의 묘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울라기리 등정의 영광을 5년 전 먼저 간 이수호 등반대장에게 바칩니다.”-경상대산악부 일동.



2000년 경남학생산악연맹은 네팔 다울라기리1봉(8167m) 등반에 나섰다. 이수호 등반대장을 비롯해 경남지역 대학생 중심으로 구성된 원정대는 의욕적으로 도전했다. 그러나 9월 29일 이수호 등반대장이 눈사태로 사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경남산악연맹은 히말라야 원정에서 첫 희생자를 낸 등반이었다. 그의 주검은 경남산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경남학생산악연맹은 다울라기리1봉 재도전에 나섰다. 경상대학교산악부는 안재홍 원정대장을 중심으로 최홍권 등반대장·변희열(촬영)·류승국(의료)·문성진(행정)·강종헌(장비)·허용필(식량)·최임복(수송·포장) 등 8명으로 원정대를 구성했다.

 
대원들이 1캠프로 오르고 있다.
폭풍·폭설 뚫고 베이스캠프 도착

3월 24일 인천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네팔 카트만두로 향했다. 카트만두에서 행정 처리 및 식량과 장비를 구입하고 포카라로 향했다. 네팔 제2의 도시이자 다울라기리 등반을 시작하는 포카라에서 2개조로 나눴다. 카라반을 시작하는 본대와 헬기를 이용해 베이스캠프로 이동하는 조로 분리했다.

3월 31일 오전 8시 헬기 한 대가 투쿠체(2590m)에 내려앉았다. 원정대 식량과 장비를 실은 헬기였다. 투쿠체는 주변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들이 풍광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다. 헬기로 먼저 도착한 류승국 대원과 셰르파들은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대원들을 기다렸다. 4월 1일 이재홍 대장과 대원, 셰르파 등 15명은 포카라에서 본격적인 카라반을 시작했다.

투쿠체를 출발한 원정대는 야크카르카(3680m)~엘레베이션캠프(4930m)~타파패스(5280m)~히든밸리(5180m)~프렌치패스(5360m)를 통과했다. 4월 8일 베이스캠프(4750m)에 도착했다. 원정대를 맞이한 것은 강력한 바람과 폭설이었다. 다음날 일반 텐트를 모두 접고, 공격용 텐트를 설치했다. 바람이 워낙 강해 파손될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바람은 숨쉬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3일간 미친 듯이 불던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1캠프 전경과 북동릉.
전통에 따라 막내 최임복 대원 첫 고정로프 설치

4월 12일 라마제를 지내고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원정대는 등반을 시작할 때 특별한 이벤트를 갖는다. 첫 고정 로프를 설치할 때 항상 나이가 가장 어린 대원에게 설치하는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례 주인공은 당시 21살의 막내 최임복 대원이었다.

그는 회상했다. “첫 해외 원정에서 고소도 제대로 적응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찰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4700m 지점에서 고정 로프를 설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악회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선배들의 격려 속에 오르기 시작했다. 잘 올라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올랐던 것 같다.”

최임복 대원은 선배들의 확보를 받으며 그렇게 200m를 전진했다. 암벽 부분에 도착한 그는 스노바 3개를 눈 속에 박고 로정 로프를 설치했다. 처음으로 히말라야에서 선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하산했다. 대원들은 2개조로 나눠 운행을 시작했다. 4월 16일 나흘 만에 1캠프(5600m)를 구축했다. 베이스캠프에서 1캠프까지는 고도차가 1000m가 넘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원정대는 전진캠프를 설치해 시간과 체력을 아꼈다.



기상악화로 3캠프 구축 지연

이탈리아 원정대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활력이 넘쳤다. 이탈리아팀은 1캠프에 설치된 로프를 사용해도 되는지 물었다.

최홍권 등반대장은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탈리아 원정대는 1캠프는 한국팀이 설치한 로프를 사용하고, 2캠프까지는 자기들이 로프를 깔고, 3캠프는 함께 설치 작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2캠프까지는 로프 작업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3캠프 구간도 대부분 우리가 결국 만들고 올라갔다.”

날씨가 악화하면서 2캠프(6400m) 설치는 4월 22일 마무리됐다.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4월 27일 강종헌·최임복·류승국 대원이 3캠프를 구축하기 위해 등반에 나섰다. 다음 날 새벽 4시 30분 장비를 갖춘 대원들은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셰르파들이 머뭇거렸다. 정상 부근 먹구름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안재홍 대장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오전 9시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눈이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설로 변했고, 앞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원들은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눈과 하늘만 바라봤다.

 
대원들이 설사면을 오르고 있다.
정상 공격조 막내 최임복 대원 뽑혀

안재홍 대장은 휴식을 취하며 정상 공격조로 강종헌 대원과 최임복 대원을 지목했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을 고려해 3캠프를 구축한 후 곧바로 정상 공격을 시작하기로 했다.

5월 1일 2명의 대원과 4명의 셰르파들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2캠프에서 산소를 사용한 대원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최임복 대원은 산소 장치가 고장나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이틀 후 3캠프(7400m)를 구축하고 페이스 조절에 들어갔다.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은 벌써 정상에 가 있다는 것을….”

그날 밤 대원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 눈을 떴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대원들과 셰르파들은 커피 한잔을 마시고 텐트를 나섰다. 밖은 추웠다. 장갑과 3중으로 된 고소화를 신었지만 손발이 시렸다. 어둠 속에서 장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등반루트
카라반루트
강종헌 대원 안타깝게 후퇴

새벽 1시쯤 멀고도 먼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와 아이젠이 눈과 맞닿으면서 나는 소리, 카라비너가 부닥치는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1시간 정도 오르다 강종헌 대원이 멈춰 섰다. 산소 장치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등반을 포기하고 말았다. 최임복은 그에게 자신의 레귤레이터를 건넸다. 최임복은 헌신적으로 등반한 강종헌 대원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최임복과 셰르파는 위로, 강종헌 대원은 아래로 향했다. 랜턴에서 나오는 가느다란 불빛만을 의지하고 한발 한발 내디뎠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은 체력적으로 더 힘들게 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설벽을 오르다 내려다본 발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고정 로프도 없었다. 이제 순수한 자신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최임복 대원과 셰르파들은 로프로 서로 몸을 묶었다. 정상은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지겨운 설벽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배가 고팠다. 커피 한잔으로 때운 아침은 여기까지였다. 목도 말랐다. 배낭에 물이 있었지만 벗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2시간이 지났다.



2005년 5월 4일 ‘여기는 정상’

오후 1시쯤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친 다리는 눈을 헤쳐나갈 힘이 없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참을 올랐다. 다행히 눈이 얼어 등반하기가 쉬웠다. 그렇게 오른 후 고개를 들었다. 셰르파를 이끄는 사다 다와가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 나온다.”

1시간 정도 힘겹게 오르자 정상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셰르파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최임복 대원은 마지막 힘을 다해 정점에 섰다. 시계는 2005년 5월 4일 오후 4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베이스캠프에 무전을 보냈다. “최임복 대원 정상 등정. 최임복 대원 정상 등정. 이상.”

안재홍 원정대장은 짧고 강하게 말했다. “축하한다. 고생했다. 故 이수호 대장의 영정을 정상에 묻어라. 그리고 조심해서 하산하기 바란다.”



정상에 사진을 묻다

최임복 대원은 품속에 있던 이수호 대장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빠르게 묻었다. 30분 정도 정상에 머문 그는 하산을 시작했다.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끝난 발걸음은 가벼웠다. 해가 진 늦은 밤 8시 30분 3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날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최임복 대원은 대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회상했다. “정상에 섰다. 기쁨보다는 ‘이제 다 왔구나’하는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말할 힘도 없어서 간단히 무전을 보냈다. 수호 형 사진을 묻어야 한다는 마지막 의무가 남아 있었다. 수호 형의 영정을 가슴에 묻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상에서 있었던 30분은 이 산을 오르기 위해 노력한 시간에 비해 훨씬 길었던 것 같다.”

안재홍 원정대장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경상대산악부의 힘들이 모여 작지만 거대한 꿈을 실현한 등반이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과정에서도 모두 한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해 등정이라는 큰 꿈을 이뤘다. 무엇보다 다울라기리1봉 정상에 서고 싶었던 故 이수호 등반대장의 넋을 기리고 영정을 묻은 것은 더 큰 기쁨이었다. 폭풍과 눈사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원정을 끝까지 마무리한 대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팸플릿

[취지문]다울라기리 등반을 열면서….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용솟음치는 신성한 정신,
유약함과 안이함에 안주할 수 없는 모험심이
또다시 우리를 히말라야 거봉에 도전장을 내게 했습니다.
산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경남의 산악인들은
눕체, 낭가파르바트, 안나푸르나1봉 남벽, 에베레스트 남서벽, 가셔브롬4봉의 등정에 이어 다울라기리봉을 등정하려 합니다.
운명처럼 산을 오르는 무상의 행위에서
인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청춘으로 남으려 합니다.


2005년 한국다울라기리 원정대장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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