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3)69회 축제의 길
개천예술제 다시 큰 걸음(3)69회 축제의 길
  • 김지원
  • 승인 2020.11.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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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개천예술제 1주일을 앞두고 진주 시내 곳곳에는 대형 입간판이 설치돼 축제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경남일보DB
1983~1989

경상남도종합예술제로 격상된 1983년 33회 대회에서 처음 시행된 개천문학신인상은 마산의 우무석 시인이 당선됐다. 차하에 정일근, 허수경 등 문학으로 이름을 남긴 인사들의 면면도 보였다. 무용부에서도 눈에 띄는 수상자가 보인다. 지난 2009년 별세한 한국무용가 이필이다. 33회 대회부터 대통령상을 주기 시작한 개천한국무용제에 걸맞는 수상이었다. 같은 대회에서 임이조가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어지는 축제의 길을 따라가보자. 

33회부터는 전야제가 공식화 되면서 초혼행렬, 호국타종, 유등점등 등과 함께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참석하는 제례가 개제선언, 헌악, 제문낭독, 분향 ,헌창 헌무, 폐제선언의 형태를 갖추어 열리기 시작했다. 이는 34회 들어 서제가 전야제 공식행사로, 개회식은 다음날 낮에 열리는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34회 축제는 서제가 자리잡게 된 이면에 1962년 제12회 대회 이후 찾아볼 수 없었던 이름, 설창수의 복귀가 있었다. 개천예술제 60년사에서는 설창수의 복귀를 이렇게 밝혔다. 

“제34회 대회를 준비하던 중에 경상님도 이규호 지사(후에 건설부 장관)와 대회장 김윤양, 예총 진주지부장 최용호 등은 모처럼 예술제 창시자인 파성을 방문하여 예술제 준비상황을 브리핑했다. 그 때 이규호 지사는 “제가 진주 사범 다닐 때 선생님께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대회를 주재하시는 모습을 간D히 볼 수 있었는데 참 멋있었습니다. 그간의 사정이 어떠했던지 간에 이제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지도를 해주십시오”하고 예술제 복귀를 청하였다.”

설창수의 반응이 크게 거부하는 기색이 없다고 여긴 김윤양 대회장은 이후 파성을 따로 만나 복귀를 강력 요청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파성은 선제조건을 내걸었다. “내가 예술제 복귀하는 데는 선결조건이 있어. 개천제단(開天祭壇)을 복구하는 것이예요”라는 설창수의 요구에 김윤양 대회장은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화답했다. 그렇게 설창수는 35회 대회부터 제사장으로 개천예술제에 복귀해 46회 대회까지 직접 참여했다. 29회부터 38회까지 대회장과 위원장 등을 맡은 김윤양은 당시 진주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던 외과의였고, 경남일보 사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김윤양 대회장은 설창수에 못지 않게 개천예술제에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서제가 정상화 되고, 축제기간 예술행사는 이전 대회처럼 문학부의 문학의 밤, 시화전, 미술부의 회원전, 음악부의 합동발표회, 연극부·무용부·국악부 등의 공연, 사진부의 회원작품전, 초대작품전, 교류전 등이 시내 곳곳에서 펼쳐졌다. 부산시향과 국립창극단의 초청공연 등 수준 높은 예술공연이 펼쳐지기도 했다.

34회 대회에서 열린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수상작인 극단 성좌(星座)의 ‘봄날’ 공연에 이어 36회 대회에서는 86대한민국연극제 대상 수상작 자유극장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37회 때 제11회 서울연극제 대상 수상작 극단 목화의 ‘부자유친’ 등 전국대회 수상작품들이 연이어 개천예술제를 찾아 수상작 앙코르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개천예술제 기간마다 열려 구경꾼들의 열광을 몰고 오는 소싸움대회.


가장행렬, 유등대회 등도 축제의 고정 축하행사로 자리잡으면서 흥겨운 개막식과 화려한 남강의 밤까지 개천예술제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았다. 22회 대회때 ‘점포장식경진’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색경진대회는 축제에 걸맞는 상가장식 부문으로 첫 대회에서 진주상의회장상을 성림회관과 메델싸롱(구 한성관)이 받아갔다. 이후로 30회 대회에서 ‘상점장식경연’으로 다시 등장한 이 부문에서는 도지사상이 주어진 금상에 녹지다방, 진주시장상에 화랑다방 등이 수상했다. 이색적인 수상기록인 셈이다.

가장행렬은 33회 대회에서 도지사기쟁탈과 교육감기 쟁탈로 나눠져 열기가 높아졌다. 도지사기 쟁탈은 시군대항, 교육감기 쟁탈은 학생일반대회로 열린 것이었다. 도지사기 쟁탈에는 거창군이 ‘민속탈춤’으로, 남해군이 ‘관광남해’, 마산시가 ‘농청놀이’, 통합시가 되기 전인 사천군이 무형문화재 12차 농악, 진양군에서 ‘모내기 놀이’ 통영군이 ‘풍어놀이’, 울산시가 농악 등으로 참가해 삼천포시의 ‘풍어제’가 도지사기를 따냈다. 교육감기 쟁탈은 시내 진주여고, 대동공고, 삼현여고, 진주중, 배영국민학교, 교대부속국민학교, 진주교대, 경상대학교 등 각급 학교들은 물론 예촌, 궁도협회, 투우협회, 진주시에서도 참가해 열띤 행진을 벌였다. 봉래국민학교 고적대가 최우수상으로 교육감기를 가져갔다. 유등대회 역시 학교별 경진대회로 펼쳐져 진주 서여중과 삼현여고가 최우수상을 가져가는 등 축제는 경쟁을 통해 참여의 열기를 높였다. 39회 대회부터 신설된 진주공단문화부는 공단문학상과 공단미술상을 시상하고 전시회도 열었다.

경남수필문학의 밤, 일요사진클럽회원전 같은 예술모임의 발표회·세미나 등과 함께 투우대회, 궁도대회, 연날리기 등도 외곽행사로 자리를 잡았고, 시화전, 우표전시회, 수석분재전시회, 수석괴목전시회, 동양난전시회, 꽃꽂이 전시회, 옛날 돈(주화) 전시회, 차도구전시회 같은 다양한 전시회와 전국장싸시름대회(35회), 한시백일장(36회), 아마복싱선수권대회(36회), 영남 4개도시 축구대회(39회), KBS노래자랑(36회) 등등도 펼쳐져 그야말로 종합예술제의 볼거리, 즐길거리를 더 했다.

아쉬운 점은 1988년 38회 대회까지 대통령상이 주어진 개천한국무용제가 39, 40회에는 문예진흥원상, 41회부터는 문화부장관상으로 바뀐 것이다. 대통령상이 주어지던 연극부 역시 33회부터 문공부장관상으로 은근슬쩍 낮아져 명색이 최고의 종합예술제로서 위상에는 금이 그어진 셈이다. 가장행렬은 35회부터 다시 경남교육감상 하나로 합쳐졌다.

 
 

1990~2000

어려운 시기에 예술을 꽃피워, 한국 현대사의 부침을 겪으면서 40여년동안 축제를 열어 온 개천예술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어찌보면 예술경연이나, 민속공연들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펼쳐졌다. 큰 부침이 없는 반면 큰 변화와 발전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의 규모면에서 대통령상이 장관상으로 낮아지거나 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축제를 되짚어 ‘개천예술제 40년사’(1991년 1월)를 발행하는 결실을 맺고, 1995년 12월에는 ‘개천예술제 발전기획위원회’를 구성해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개혁에 대한 고민에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3회 대회부터 13회까지 6일간 개최됐던 개천예줄제는 이후 5일, 4일로 축소돼 개최되다 1991년 41회 대회부터 6일로 다시 늘어나 개최되기 시작했다. 1999년 49회 대회부터는 9일간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전까지는 음력 개천절을 따지는 등 대회 일자가 10월 말부터 11월초까지 들쭉날쭉했지만, 2000년 50회 대회부터는 대회 일자도 10월 3일 개천절부터 10일까지로 고정하면서 개천절에 열리는 개천예술제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남겨주었다.

1994년 44회 대회부터 개천미술대상전에 디자인 부문이 추가됐다. 1996년 46회 대회부터는 경남일보 주최로 개천예술제 기간 중 ‘남인수 가요제가’ 개최됐다. 진주 출신 대중가수 남인수를 기리는 가요제로 열려 1등상에게는 가수증을 주는 대회였다. 남인수 가요제는 개천예술제 기간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개최되는 등 인기를 끌었지만 2006년 남인수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로 거론되면서 남인수의 이름으르 딴 가요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진주시민운동에서 예산집행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는 등 갈등을 빚고 2008년부터 이름을 진주가요제로 바꿔서 열렸다.

47회 대회를 끝으로 설창수가 제사장 자리를 떠나게 됐다. 설창수는 1998년 6월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설창수가 없이 치러진 48회도 국토 동해물 헌정, 성화봉송은 지켜졌다. 다만 성화 채화를 놓고 집행부는 논의 끝에 마니산 채화를 중단하고 진주성에서 채화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998년 10월 9일 박물관 앞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개회식에는 제주 오현고 밴드가 식전 공개행사로 공연을 선보였다. 설창수 이후로 김동렬이 제사장 자리를 지킨 후 1999년 49회 대회부터는 대회장과 제사장이 분리되어 있던 제전 집행이 제사장 없이 대회장 1인이 진행하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 1998년에는 개천예술제발전기획위원회의 ‘개천예술제 발전방안에 관한 보고서’가 발행돼 예술제의 운영평가와 발전방안에 대한 길잡이를 내놓기도 했다.

49회 때는 교육감상이 주어진 창작등경연대회가 처음 열려 진주 동명고가 최우수상과 지도교사상을 받았다. 다음대회부터는 창작등 경연대회가 대폭 확대돼 진주성과 남강변에서 학생들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창작등 전시회가 개천예술제 기간마다 열리게 됐다. 49회 대회때는 승산배 전국씨름대회가 열려 여자부와 읍면동 단체전, 진주시 남자부에서 장사를 가리기도 했다. 축제기간의 마무리에는 원로예술인들의 회갑연을 챙기는 ‘문화예술인 교환회’도 열려 예술인들의 화합과 교류에 한몫을 했다.

 

2015년 제65회 개천예술제 종야축제. 시민들이 한데 어울리는 한마당 행사로 열렸다.

2001~2019

광복의 기쁨과 정부수립을 기념하며 출발한 개천예술제는 지치지 않고 달려와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았다. 10년 주기의 예술제 역사를 요약하며 이 시기를 흔히 정립기라고들 한다. 실은 안정기에 접어든 예술제는 어찌보면 정체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다할 이슈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두드러진 일이라고 꼽는다면 개천예술제를 박차고 나가 세계적인 축제 두각을 드러내면서 진주의 대표축제를 바꿔버린 유등축제의 성장일 것이다. 2000년 제50회 개천예술제부터는 덩치가 커지고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등대회가 ‘진주남강 주제 등축제’로 분리됐다. 

개천예술제 60년사의 수상자 명단에서는 초창기 전국 각지 출신의 수상자가 기록된데 비해 후기로 오면서 영남 일대의 학교와 지역 출신으로 수상자 범위가 좁혀지고 있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용부의 개천한국무용제는 전국적 규모를 어느정도 유지해, 서울, 전주 등지의 전통예술인들의 수상이 이어져 왔다. 그러던 것이 2002년 52회 대회부터 예산부족으로 개천한국무용제 개최가 취소됐다. 그나마 명성을 유지해오던 전국대회 규모의 무용제가 사라진 것이다. 무용부 시상은 58회 대회에서 다시 일반부 최고상에 문화체육부장관상이 주어졌다가 한 해 만에 도지사상으로 바뀌기도 했다. 미술부의 개천미술대상전, 문학부의 개천문학상 등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상이 이어졌고, 음악부와 연극부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하지만 예술제 초창기와 같이 대통령상이나 각부처 장관상 등은 찾아볼 수 없어 전국예술경연대회의 수상 명성은 크게 줄었다.

52회 대회는 ‘너와 나 우리 하나되는 한마당’이라는 주제로 진주시내 중앙광장과 금성광장을 연결하는 중심가에서 종야축제를 열었다. 농악 한마당과 줄싸움으로 시민이 한데 어우러지는 난장축제로 행사를 마무리하며 시민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55회 개천예술제 ‘세계의상페스티벌’행사에서는 김태호지사 부부와 42개국 대사부인이 참가한 한복의상쇼가 열리기도 했다.


2004년 제54회 개천예술제는 탄생한지 반세기를 넘겨서 제2 창제 취지문을 내놓았다. 개천예술제의 창립부터의 역사를 되집고, 그동안 전통예술경연을 통해 우리 문화예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해왔음을 밝히고 지역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밝히는 내용이었다. 55회 개천예술제에서는 42개국 대사부인들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세계의상페스티벌 행사’를 벌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12년 진주대첩 420주년을 기념해 열린 62회 대회때는 임진왜란 승전역사를 스토리텔링해 서제와 개제식에서 진주목사 임명식, 부임행차 등을 재혔다. 종야축제 때는 ‘승전기념 한마당 행사’로 진주성 취타대·수성 종군영 기수, 타악 등 1200명 등이 출연해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진주교-광미사거리로 이어지는 1.9㎞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61회 대회부터 종야제에 펼쳐진 창작 뮤지컬 ‘진주대첩’은 62회까지 이어졌고 63회 대회에서는 ‘촉석산성 아리아’라는 진주대첩 재해석 뮤지컬이 초연을 펼쳤다. 마침 이 대회는 모처럼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회에 참석하는 등 개천예술제의 위상이 다시 높아진 대회였다. 개회식 후 진행되는 가장행렬과 별도로 서제에서는 진주대첩 승전기념 야간 가장행렬이 처음 실시됐다. 특히 ‘촉석산성 아리아’는 65회 대회에서는 공연일자를 연장해 3일간 진주성 특설무대에서 공연됐고, 지난해 69회 대회까지 수상무대에서 펼치는 뮤지컬 공연으로 인기를 누렸다.

2016년은 파성 설창수의 탄생 100주년으로 제66회 대회 기간 중 추모제를 마련해 개천예술제 창제 주역이자 예술 대중화에 헌신한 고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2017년 67회 대회에서는 촉석루와 의암, 절벽에 임진왜란 역사를 다룬 미디어파사드가 첫 선을 보이기도 했다.

 
2012년 개천예술제 개제식에서 성화를 채화하는 모습.


2018년 종야축제에서는 ‘풍등’이 뜻밖의 관심을 받았다. 고양에서 발생한 폭발·화재 사건이 ‘풍등’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밝혀져 종야축제에 띄워 올린 ‘풍등’의 안전성이 의심받았지만 진주시의 답변은 2014년 64회 대회부터 등 안에 소형 LED 조명을 장착한 ‘LED 풍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해 68회 대회에서는 동춘서커스가 다시 축제장을 찾아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인기를 끌었다.

첫 대회때 문학, 미술, 변론 3개 부문 시상으로 시작된 예술제는 69회 대회까지 문학부, 미술부, 사진부, 연극부, 음악부, 웅변부 등 장르별 예술경연은 빠지지 않고 진행됐고, 국악부, 시조경창대회, 창작등경연대회 등이 추가로 신설되거나 확대되는 등 예술경연은 큰 변화 없이 이어져왔다. 연극부 대상과 무용부 개천한국무용제가 한 때 대통령상을 시상하며 위상을 높였으나 지금은 전주대사습놀이나 김해가야금경연대회 등 대통령상을 두고 겨루는 개별 경연대회에 비해 종합예술제로서 다양한 예술장르를 모두 겨룬다는 의의를 이어가고 있다.

10월 축제기간은 개천예술제 뿐만 아니라 유등축제, 드라마페스티벌 등 화려한 축제가 함께 열려 볼거리도 많고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한 때 유등축제 유료화로 불만소리가 높았던 것도 그만큼 관심이 많은 축제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다만 화려한 축제기간에 비해 정작 축제의 출발점인 개천예술제에 대한 관심은 부족하다는 점이다. 해마다 개천예술제 수상작 전시나, 경연대회와 시상식이 축제기간 진주 곳곳에서 펼쳐지지만 찾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진주 10월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이 진주성 불꽃놀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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