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남은 가야의 흔적[4]
경남에 남은 가야의 흔적[4]
  • 박준언
  • 승인 2020.11.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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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안팎 지역간 교류...신라로의 편입과정 파악
고성 송학동 고분군. 사진제공=가야고분군세계유산등재추진단
4.고성 송학동고분군(사적 제119호)

경남 고성군 송학동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소가야(小伽耶) 지배층의 집단무덤이다. 해안과 접하고 있는 고성분지에 조성돼 있어 바닷길을 통해 백제, 일본 등과 자율적으로 교섭했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학산(舞鶴山) 또는 무기산(舞妓山)이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10여 기가 넘는 대형봉토분이 제1고분군과 제2고분군으로 나뉘어져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개간 등으로 훼손돼 원상태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봉토분의 숫자는 적지만 각 봉토 내의 1기 단독 또는 여러 기의 석곽이 연속적으로 축조된 모습은 고분을 군집해 조성한 가야연맹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낮은 구릉지에 높은 봉토를 쌓은 다음 그 상부를 굴착해 매장부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고분을 완성했다.

1호분을 중심에 두고 보다 소형의 봉토분들이 서측에 2기, 동측에 3기 모두 6기가 분포하고 있다. 하나의 묘역으로 설정한다면 길이 66m에 달하는 규모가 큰 고분이다. 이 고분은 1914년 도리이(鳥居龍藏)에 의해 약식 조사된 바 있으나 조사결과는 자세히 보고된 바 없다.

사적범위 내에는 1~14호분까지 고총이 분포하고 있으나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에 비해 발굴조사가 적게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1호분과 1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현재 7·8호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송학동 고분군은 1999년과 2000∼2001년까지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시굴과 발굴조사가 실시돼 고분의 성격이 밝혀지게 됐다. 특히 시굴조사에서 한·일 양국간에 관심의 대상이었던 제1호분이 전방부가 둥글다는 점과 여기에 대형의 돌방(石室)이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아니라 3기의 원형고분이 중첩해서 연접된 것임이 밝혀졌다.

1호분의 발굴조사에서는 시굴조사 시 확인된 3기의 중첩봉토분은 먼저 분구를 조성하고 이를 다시 파서 묘를 축조한 영산강유역과 연결되는 분구묘임이 확인됐다. 가장 남측에 먼저 조성된 A호분에서는 주축을 전체 봉토의 장축과 엇갈리게 배치한 길이 10m, 너비 1.4m인 1기의 구덩식돌덧널(A-1호)을 중심으로 9기의 소형 돌덧널들이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구의 배치모습은 소가야 또는 고자국(古自國)이라 부르던 이 지역이 삼국시대 정치체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돼 현재 목긴항아리, 구멍이 있는 작은 항아리(有孔廣口小壺),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마구류 등이 잔존하고 있다.

A호분과 약간 떨어져서 북측에 조성된 B호분은 중앙에 대형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 B-1호분)을 배치하고 그 옆에 소형의 구덩식돌덧널 1기를 배치한 것이다. 특히 널길과 돌방 내부의 천장을 비롯한 네 벽에 붉은색으로 도장한 채색고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채색고분은 일본의 큐수지방과 칸사이지방 고분시대 고분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한·일간 고분연구에 있어서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A호분과 B호분을 연결하여 중앙에 조성된 C호분에서는 역시 입구를 서쪽에 둔 활(穹륭狀)천장으로 5.6×2.6×2.4m인 굴식돌방무덤 1기가 축조되어 있었다. 이 돌방은 서남부 가야지역에 처음에 조성되던 세장한 장방형의 돌방으로 알려져 있다. 돌방의 구조상으로는 재지 가야지역의 구덩식돌덧널과 서쪽에 인접한 백제지역의 굴식돌방의 특징이 혼재한 것으로 추정되며 부장된 유물의 특징에서는 신라와 일본과도 교류한 흔적이 있다.

이들 특징을 참고해 볼 때 대략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A호분에서 출토된 ‘하소오’라고도 부르는 유공광구소호와 뚜껑접시 등은 일본이나 백제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많이 비슷해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고분의 축조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로 보인다.

송학동고분군의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지배층이 주변의 제국들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경식’(목걸이).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기대’.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유공광구소호’.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마령’(말 장신구).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행엽’(말 장신구). 사진제공=고성군
고성 송학동고분군 출토 ‘옥’ 종류. 사진제공=고성군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창녕읍 교리와 송현리 일대에 걸쳐 있는 비화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송현동고분군은 목마산(463m)의 남서쪽 구릉 말단부와 남동사면 일대에 50여 기가, 교동고분군은 목마산성의 북서쪽에서 남동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정선을 따라서 90여 기가 분포돼 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가장이 가능한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을 매장주체부로 하였고, 석곽의 평면은 세장방형이 대부분이다.

1910년 일본인 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해 처음 고분군의 존재가 알려졌다. 1918년 최초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1931년까지 주요 고분에 대한 조사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진행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다.

1918년에 조사된 교동 제5-12호분, 제21·31호분과 송현동 제89·9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이 마차 20대, 화차 2량 분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는 금동관을 비롯해서 금제귀걸이(金製耳飾), 금·은제 용무늬고리자루큰칼(龍紋環頭大刀), 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腰佩)장식, 말띠꾸미개(雲珠), 말띠드리개(杏葉)과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긴목항아리(長頸壺) 등 다량의 토기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으로 밀반출 되는 등 현재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199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일제강점기 이후 60여년 만에 조사가 재개된 이후 2012년에 실시된 정밀지표조사 결과 봉토분 101기와 봉토가 남아있지 않은 고분 116기 등 총 217기가 분포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진행된 발굴조사 등을 통해 고분 수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무덤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중심연대는 5~6세기며 7세기 대까지 소규모 군집분으로 연속 축조돼 가야에서 신라로의 고분문화 변천을 잘 보여주는 고분군으로 평가된다.

중심묘제로 사용된 세장방형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가야 고유 묘제인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을 축조 집단의 매장문화와 지형에 맞게 변형해 창조한 독특한 묘제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세 벽을 깬돌로 쌓아 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 뒤, 막지 않은 짧은 벽을 통해 시신 혹은 관을 안치하는 구조다. 그런 다음, 나머지 벽을 쌓아 막고 그 위로 흙을 쌓아올려 봉분을 만들고 내부공간은 장방형이 되게 만들었다. 돌방 내부 입구부 아래 바닥 공간에서 제1호분 3명, 제3호분 2명의 순장(殉葬)으로 추정되는 치아와 사람뼈조각이 수습되기도 했다.

특히 2007년 송현동고분군 중에서 가장 큰 무덤인 15호분에서는 1500여년 전의 인골이 발견했다. 주피장자 한 명과 네 명이 순장된 이 고분에서는 치아가 다 발달 되지 못하고 성장판도 닫히지 않은 16세 소녀의 인골도 나왔다. 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통해 되살아 난 이 소녀는 ‘송현이’ 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묘역의 선정 단계부터 봉분을 쌓을 때 공간을 구획하는 등 고분은 철저한 기획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다양한 재료와 축조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하나의 봉분 안에 하나의 무덤방을 가지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대가 되면 돌방무덤의 너비가 넓어지는 등 신라식의 돌방무덤이 확산되는 것으로 보이며, 대형 봉토분 주변에 군집의 형태로 축조되는 등 무덤 조영의 변화가 나타난다.

비화가야는 신라와 가야의 경계에 위치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물론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신라·백제의 다양한 장식말갖, 금동관, 청동세발손잡이, 둥근고리큰칼, 대가야의 귀걸이를 비롯해 일본산으로 추정되는 녹나무로 만든 관, 사슴뿔로 만든 장검, 조개장식말띠꾸미개 등이 나왔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비화가야의 성립과 발전, 한반도 안팎의 지역 간 교류와 신라로의 편입과정을 고고학적으로 살필 수 있는 창녕지역의 핵심자료로 평가된다.

박준언기자

 
창녕 ‘교동’고분군 전경. 사진제공-창녕군
도굴흔적 없는 창녕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사진제공=창녕군
창녕 송현동 7호분 출토 ‘청동뿔잔’. 사진제공=창녕군
창녕 송현동 고분군 출토 ‘인골’과 ‘유물’. 사진제공=창녕군
창녕 송현동 15호 고분군에 순장된 인골을 복원해 만든 16세 소녀 ‘송현이’. 사진제공=창녕군
창녕 송현동 고분군 목곽묘 출토 유물. 사진제공=창녕군
창녕 3호분 출토 ‘관모’(冠帽). 사진제공=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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