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반짇고리
[경일춘추]반짇고리
  • 경남일보
  • 승인 2020.11.2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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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란 (수필가)
 

 

가을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로 한동안 조용했던 결혼예식장이 활기를 띤다. 여기저기서 가까운 이들이 며느리와 사위를 보게 되니 결혼식 분위기가 피부로 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사십 년 가까이에 이르는 우리의 결혼식도 단풍이 물드는 이맘때였다. 살림이 여유롭고 손끝이 여문 이모는 두 딸을 시집보낼 때 장롱부터 시작하여 한복집. 이불집 등을 돌며 알뜰살뜰하게 혼수를 장만했다. 이모의 반듯한 혼수 살림에 비하면 어머니는 딸들에게 해준 게 없어 ‘부모도 아니라고’ 자책했다.

반짇고리와 이불 한 채를 해서 시집온 나는 어머니의 사정을 빤히 알았기에 혼수 예물로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월급을 받으며 집안 살림에 보탰다. 얼마간의 저축한 통장을 두고 시집을 올 만큼, 어머니는 육 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리곤 했었다.

작은오빠의 대학 등록금으로 소 한 마리와 작은골 대장 밭 한 뙈기, 외말리 논 한 마지기를 팔았다. 어머니의 그 억척스러움과 함께 옆에서 버팀목이 되었던 큰 오빠의 역할이 컸으므로, 더는 농토를 처분하지 않았다. 어쩌다 서울에서 작은오빠가 내려오면 내가 대학생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하도록 자랑스러웠다. 당시 형제간의 정은 호두알처럼 단단했다.

반짇고리는 어머니의 뜻깊은 마음을 헤아린다.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과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라는 친정어머니의 염원이 담겨있다. 어려운 고비를 함께 보냈던 무던한 남편의 모습처럼, 항상 그 자리에 익숙하게 놓여있다.

노후가 된 삐걱거리는 반짇고리 뚜껑을 연다. 바느질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어머니처럼 눈썰미가 있어서 헌 옷으로 짧은 치마나 원피스를 만드는 일도 않는다. 이따금 터진 단추 구멍이나 바지 단을 깁지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처럼 긴 세월을 함께 머물렀다.

어머니는 가끔 상념에 젖곤 했다. 딸들과 혼수 준비를 하면서 함께하는 잔잔한 행복감이, 자식 육 남매를 키운 보람이었을 테다. 딸아이가 시집가면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만회하리라, 무언의 약속을 했다.

오밀조밀한 행복감은 순전히 나 혼자 생각이었다. 시집보내는 딸애와 나란히 살림살이를 장만하려 다닐 일은 없었다. 저희끼리 신혼집을 구했다. 솜이불 한 채와 반짇고리 하나로 시집을 보냈던, 친정어머니의 아릿한 마음은 접어두어도 무방했다. 딸애의 혼수 준비는 깔끔했다. 정작, 반짇고리 하나 뒤 밀 틈새도 없었다. 스마트한 세대였다.

허정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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