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소 잃고 뇌 약간 고치는 중?
지금 소 잃고 뇌 약간 고치는 중?
  • 경남일보
  • 승인 2020.11.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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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근래에 ‘소 잃고 뇌 약간 고친다’는 우스개를 얻어들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옛말의 패러디다. 집값 대책 같은 데서 열받아 부글거리는 젊은층의 여야 지지율 추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이 말 맨 처음 만든 이의 재치에 키득대다가 생각이 뻗는다.

여당은 내년 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 위해 이달 초 당헌을 개정했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잘못 땜에 치르는 재·보궐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규정을 삭제한 것이다.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적용하지 않은 조항이었다. 이번에 실행해볼 계제인데 싹 지워버렸다.

이 규정은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대표 때인 2015년 만들어 넣었다. 당시 그는 이 규정더러 ‘정치 개혁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이 안이 당혁신위에서 부결되면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도 했다. 부결시키진 않았지만 한 번도 실행하지 않고 지웠으니 정치 개혁은 출발도 하지 않은 셈이다. 야당대표로서 자신감 넘치던 그 무렵 고성군수 재선거가 있었다. 유세에서 새누리당 소속 군수의 선거법 위반으로 치르는 선거인 만큼 새누리당은 후보를 내지 말라고 호통쳤다. 군민 부담인 선거비용을 책임지라고도 했다. 야당 대표의 말씀이 달고 시원했다. 올가을 여당 당헌 개정의 뒷맛은 그렇지 않다. 속담처럼 말 단 집 장맛이 달지 않은 격이다.

문 대통령은 작년 7월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줬다. 주면서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엄정 수사해달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 시절의 윤 총장 발언을 들면서 그 자세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도 똑같은 자세여야 한다고도 했다. 국민의 귀는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윤 총장은 그런 자세 지키느라 큰 난관에 부딪쳐 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대통령은 명시적인 입장 표명 한마디 없다. 국민들 심중은 의아하고 씁쓸하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한분도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당연한 말인데도 달아서 환호했다. 청와대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고, 주요 국정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고,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토론도 하겠다고 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고,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고 했다. 일찍이 한번도 들어보지 않은 아름다운 취임사였다. 임기 1년 반쯤 남겨놓은 지금 이 중 어떤 것이 실천되었는지 사람들은 묻고 있다.

대중을 열광시킨 취임사의 꽃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말이리라. 전율 일으키는 이 명언에 토씨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문장가가 또 있을까. 그러나 국민들은 의아하다. 지금 우리가 예전보다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조금이라도 맛보고 있는가고 진지하게 묻는다.

거듭되는 인용이지만 ‘장 단 집엔 가도 말 단 집 가지 마라’고 했다. 듣기 좋은 말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남의 장맛은 먹어볼 때까지 알 수 없고 말은 저절로 들린다. 장맛이 달지 쓸지는 나중 일이고 우선은 매끈한 언변에 끌리기 쉽다. 문제는 장맛 알고 난 다음이다.

유행어마따나 소는 잃었지만 뇌를 약간 고친다면 그나마 다행일 터. 한데 우리가 잃어버린 ‘소’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하여 열받기 전에 잃은 것의 목록부터 적어볼 일이다. 신성한 주권인가, 경제 선진국의 자존심인가, 내집 마련의 꿈인가, 정의로운 법치인가, 인간에 대한 믿음인가…. 그런 걸 곰곰이 따져본 후에 뇌를 약간 고칠 수 있다면 좀더 나은 다행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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