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알려주는 향기로운 유자
겨울을 알려주는 향기로운 유자
  • 경남일보
  • 승인 2020.12.0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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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남해군 문화관광과)
 

 

늘 아침 사무실 향은 사뭇 다르다. 마스크를 잠시 벗고 깊은 숨을 들이쉬니 겨울이면 달콤한 향과 따뜻한 추억으로 이끌어주던 유자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유자,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외가의 뒷산에서 유자를 따 겨울밤이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유자청을 만들었다. 수제유자차는 마시기엔 간단하지만, 마시기전까지의 과정은 손이 많이 간다. 그걸 알 리 없는 나의 네 남매들은 제비새끼처럼 엄마주변에서 설탕을 뿌린, 채 썬 유자를 간식처럼 집어 먹었다. 새콤한 유자와 달콤한 설탕이 만들어낸 환상의 콜라보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유자따기와 유자청 담기는 겨울을 맞이하는 우리 집 연례행사가 되었고, 엄마는 그 수제유자청을 팔아 수입을 올렸다.

훌쩍 키가 큰 유자나무 옆에 두발 사다리를 세워놓고 올라가 유자를 딴다. 따온 유자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으면서 검버섯 같은 딱지가 앉거나 흠집이 있는 부위는 살짝 도려내고 깨끗이 잘 씻어 물기를 제거한다. 유자를 사등분으로 잘라 속은 파내고 엄마는 겉껍질을 날카로운 과도로 포를 뜨고, 나는 엄마가 포뜬 유자를 채로 썰었다. 두 팔을 벌려야 끝이 닿는 커다란 스테인리스 대야에 채 썬 유자를 펼쳐 담고, 설탕을 켜켜이 뿌리고 아랫목에 두면 유자의 수분과 녹은 설탕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향이 깊은 유자청을 만들어냈다. 이 작업은 한창 잠 많은 여고생인 나에게 곤혹의 시간이었다. 긴 노동이 하루 만에 끝나기는 힘들어 다음날에는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선전포고를 하면, 엄마는 비밀병기라도 알려주시는 듯 “나중에 어른 되고, 사람을 부리고 살 때가 오면 네가 할줄 알아야 된다. 부리는 사람이 너를 속이는지 어떻게 알 것이냐, 남의 머리에 든 글도 배우는데, 보고 따라하는 유자채썰기도 못해 되겠냐. 그리고,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너는 정말 채를 너무 잘 썬다” 순진했던 나는 엄마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엄마 품 안의 자식으로 사는 동안 자칭 유자채썰기의 달인이 되었다.

오일장을 맞은 남해전통시장에는 향기롭고, 때깔 좋은 유자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유자향기는 명품향수보다 향이 짙고, 유자차는 금방이라도 감기를 낫게 할 명약 같다. 유자농사가 대풍을 이루었을 때는 유자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자식들 큰학교 보낸다는 대학나무였다. 유난히 힘들게 보내는 올 겨울에는 유자차 한잔에도 향기로운 공간, 건강한 시간을 담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김연경 남해군 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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