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쓰기]경상대학교.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
[우리말쓰기]경상대학교.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
  • 박철홍
  • 승인 2020.12.07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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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계획을 세울 때부터 우리말 사용 고민을

처음에 영어로 된 사업명 붙이면 그대로 쓰이는 경우 많아
‘혁신 플랫폼’→ ‘혁신 기반’ ‘혁신 연결망’ ‘혁신 토대’
ICT는 우리말과 영어 약자 병기, 원어도 풀어 써 줘야
‘USG 공유대학’은 뜻 겹치는 잉여적 표현으로 주의를

대학에서 하는 정부 지원 사업의 이름에 영어가 넘쳐난다. 문제는 정부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령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대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경쟁력 강화, 지역 간 균형발전을 위해 실시한 사업은 ‘지방대학 혁신역량 강화 사업’인데 이름이 너무 길다. 그래서 이 사업의 영어 명칭 ‘New University for Regional Innovation’의 머릿글자를 따서 ‘NURI(누리)’라고 했다.

연구중심 대학원으로 선정되는 대학을 지원하는 ‘두뇌한국21’ 사업은 ‘BK21(비케이21)’로 불렀다. 대학과 기업의 협업과 상생을 지원하는 ‘산학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은 ‘LINC(링크)’사업이라고 한다. 다른 사업의 영어 명칭이 주로 머릿글자를 따온 데 비해 이 링크사업은 이런 규칙에서도 벗어나 버렸다. ‘Leaders in Industry-university Cooperation’이다.

교육부에서 전국 대학에 돈을 내려보낼 때 이런 이름을 붙이니까, 각 대학에서는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용어들은 교육부와 각 대학의 홍보실을 거쳐 언론사에 전달되고, 딱히 다른 말을 찾을 길 없는 언론사는 이를 고유 명사로 분류해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일반 국민은 물론, 대학에 아이를 보낸 부모들조차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학생들조차 잘 모른다. 링크사업은 링크플러스(LINC+) 사업으로 진화했는데 ‘LINC+’라고 쓴 보도자료를 받아든 기자들은 홍보실로 전화해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교육부가 올 7월에 발표한 사업의 이름은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이다. 경남, 충북, 광주·전남 등 전국에서 세 곳만이 선정됐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업의 이름이 제법 길다.

따라서 이 사업을 수행하는 지자체와 대학들은 ‘지역혁신 플랫폼 사업’이라고 부른다. ’플랫폼’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이 사업을 총괄하는 경상대학교는 보도자료에서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 사업’이라고 표기했다가 나중에는 ‘경남지역 혁신 플랫폼’으로 줄여 부른다. ‘플랫폼(platform)’은 기반, 장, 승강장, 덧마루 등의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서는 ‘기반’이라는 뜻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경남지역 혁신 기반’, ‘경남 혁신 연결망’, ‘경남지역 혁신 토대’ 등으로 바꿔 쓰지 못할 까닭이 없다.

경상대학교 국어문화원 관계자는 “이전에는 ‘허브’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요즘은 ‘플랫폼’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 같다. 대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번 ‘경남지역 혁신 플랫폼 사업’이 등장했다”며 “보통 교육부에서 영어로 된 사업이름을 붙이면 대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반대로 대학과 지자체에서 영어 이름을 붙인 경우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 사업은 2021년 5월까지 경남 지역 대학·기업·연구 기관 등이 ‘경남지역 혁신 플랫폼’을 구축해 ‘스마트 제조엔지니어링’, ‘스마트 제조ICT’, ‘스마트 공동체’ 등 세 가지 핵심 분야에 대해 지역수요에 맞는 대학 교육 체계 개편, 인재 육성 및 기술 개발을 수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시대의 유행어가 되어 버린 ‘스마트’라는 말도 나왔고, ‘ICT’라는 말도 나왔다.

‘스마트 제조엔지니어링’은 ‘스마트 기술을 활용한 제조 공정’ 또는 ‘지능형 제조 공정’이라고 할 만하다. ‘스마트 제조ICT’는 스마트 기술을 이용해 제조한 정보 통신 기술이라는 뜻 같은데 분명하게 와닿지 않는다. ICT는 ‘정보 통신 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처럼 우리말과 영어 약자를 병기하고 원어를 풀어서 써 주어야 이해하기 쉽다. ‘스마트 공동체’는 인공 지능과 사물 인터넷 등 스마트 기술을 이용해 공동체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바꾸는 것이라는 뜻 같은데 역시 모호하다.

경상대학교와 경남도는 이 사업에서 공유형 대학 모델을 대표적인 과제로 내세웠다. 공유형 대학 모델이란, 대학 간 연합 교육 과정 개발·운영을 통해 핵심 분야별로 공동의 학사 조직을 구성하고 학점 교류와 교육 과정 공동 운영을 통해 소정의 이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USG 공유대학’이다. ‘USG’는 ‘University System of Gyeongnam’의 머릿글자에 따왔다고 한다. ‘USG’라는 말에 ‘공유대학’이라는 개념이 포함돼 있으니 ‘USG 공유대학’이라는 말은 잉여적 표현이다. ‘경남 공유대학’, ‘경남권 공유대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금방 익숙하게 된다.

대학에서 배포하는 보도 자료는 대개 어렵다.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용어들 때문이다. 교육부에서 사업 이름을 정하고 대학에서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짠다. 보도자료를 쓸 때는 이미 늦었다. 생짜배기로 영어를 나열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학은 지식인 집단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수준 높은 학문적 논의를 하는 광장이다. 대학에서 논의된 사회적 주제는 곧바로 언론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간다. 대학에서 먼저 사용하는 학술 용어나 전문 용어들이 머지않아 언론에 오르내리고 그것은 마치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말처럼 쓰인다. 이런 일을 우리 사회는 수십 년 동안 아무런 반성 없이 이어오고 있다.

경상대학교 국어문화원 관계자는 “교육부에서 재정 지원 사업 계획을 세울 때 먼저 우리말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짜는 대학에서도 꾸준히 대안을 찾는다면 어렵지 않게 외국어를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이지만 고유 명사처럼 쓰이는 용어는 한 번 정하고 나면 되돌리기 어렵다. 무엇이든 처음 이름을 붙일 때 공공 언어의 기본 원칙에 걸맞게 신중하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대학이 영어 청정 지역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을 잘 살려 쓴 동아리 이름이나 행사 이름들을 이따금 만날 수 있다. 대학들이 솔선수범의 자세로 우리말의 미래를 더 깊이 고민해 주었으면 한다.


박철홍기자·도움말=경상대학교 국어문화원


 

지난 8월 18일 LG전자에서 열린 지자체-대학 협력기반 지역혁신사업 부총리 주재 간담회. 사진제공=경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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