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180석도 모자라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180석도 모자라나
  • 경남일보
  • 승인 2020.12.0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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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기 (논설위원)

얼마 전 뜻 하지 않게 한 달여 동안 두 차례나 병원 신세를 진 적 있다. 돌발성 질환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입원했다가 첨단 의료기술 덕분에 이른 시일 내 일상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후 몇 차례 통원 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중이다. 무슨 일이든 당해 봐야 아는 것일까.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했고, 의료진의 노고에 대한 고마움도 처음으로 체감했다. 체계화된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편하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다. 제2의 건강보험이라 불릴 만큼 필수화된 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을 청구하면서 겪은 불편함과 번거로움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보험사와 병의원 마다 각기 다른 서류를 일일이 떼야 하는 복잡한 서류준비와 일정한 비용 부담을 요구하는 문제점 등은 분명 개선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IT강국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마침 이달 초 이러한 불편과 비용, 업무량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입법을 추진해 기대를 모았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실손 보험금을 간단하게 전산청구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했지만 의료계의 반발로 가로막힌 것이다.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보험업법 개정안은 의료기관이 실손보험 가입자의 요청을 받아 보험금을 전산으로 청구할 수 있게 하여 가입자 편의와 이익을 증진하는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자는 취지다.


2018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 3400여만 명 중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데도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은 비율이 47.5%나 나왔다. 절반 가까이 보험금을 포기한 셈이다. 금액이 적어서(73.3%:복수응답)가 많았지만, 시간이 없거나(44%) 서류 챙기기 귀찮아서(30.7%)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돼 청구서류 간소화의 필요성을 증명했다. 또한 연간 실손보험 청구 건수 9000만 건(2018년 기준) 중 76%가 서류를 팩스나 방문을 통해 접수하는 종이서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보험 청구 전산화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에 쫒겨 살다보니 얼마되지 않는 금액은 복잡한 서류를 챙기는게 귀찮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는 이야기다. 실제 겪어 보니 충분히 공감 가는 부분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환경이 일상이 된 요즘 각 보험사들이 스마트폰 등 비대면 채널로 보험금을 간편 청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속속 내 놓고 있지만 실손보험은 예외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이미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제도개선을 권고했던 사안이다. 10년이 지난 세월동안 몇 차례 국회에서 입법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그동안 의료계가 반대해 온 주된 이유 중의 하나인 심평원이 서류 전송 외 다른 목적으로 정보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의료계의 입장을 고려한 조항을 넣었는데도 이번에 또 무산됐다. 시민·소비자단체는 그동안 소비자 편의 증진을 위해 청구간소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보험업계도 청구간소화로 보험금 지급 규모가 다소 늘겠지만 단순 반복 업무에 드는 비용 감소를 계산해서 몇 년 전부터 찬성하는 입장이다. 소비자인 국민이 원하고 정부도, 보험사도 원하는 정책이 의료계의 반대논리에 막힌 형국이다. 실손보험청구 간소화 법안은 올해 국회정무위원회의 벽을 넘지 못해 상임위 배정이 바뀌는 21대 국회 후반기에나 다시 논의 될 전망이다. 소위의 만장일치 관행으로 몇몇 의원만 반대해도 처리가 안 되는게 문제다. 의료계가 이 지점을 집중 공략해 저지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 없어 보이던 무소불위의 ‘180석’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난공불락의 성인 모양이다.

한중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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