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실방의 빗물
연실방의 빗물
  • 경남일보
  • 승인 2020.12.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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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량 (동랑청마기념사업회 이사)
 
 

 

문득 연못이 생각났다. 물이 고여 있는 곳을 ‘못’이라 하는데, 그 못에 개구리밥이나 부레옥잠, 애기마름 같은 식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연못’이라 부른다. 연못은 연(蓮)이 있는 못이어야 하지만 이제는 연이 있건 없건 그걸 따지지 않고 그냥 연못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때, 7월 하순의 아름다운 연꽃들이 피었던 그 연못이 궁금해졌다. 이 겨울에는 어떻게 변했을까? 화려함의 다음에 오는 연못의 슬픔 같은 것이 동병상련으로 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비를 한껏 머금은 검은 구름조각들이 하늘을 떠다니는걸 보면 금방이라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다. 거기에 간다한들 헛헛한 마음으로 되돌아오게 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산을 챙긴다. 꽃도 잎도 다 떨어진 연못으로 향한다.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연못에 다다르기도 전에 제법 굵은 빗방울이 되어 내린다. ‘비가 오는 겨울’ 그것이 남쪽지방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겨울풍경이다.

연못은 생각대로 을씨년스럽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무성한 연잎으로 물빛조차 볼 수 없었던 연못은 이제 휑하니 제 몸을 다 드러내고 있다. 연못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대궁 끝에 매달린 대부분의 연실방은 물속에 잠기거나, 대궁이 꺾어져 머리를 숙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몇몇은 그래도 아직 하늘을 향해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다.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대궁은 비 내리는 하늘만큼 시커멓다. 계절이 바뀌는데 그대로인 것이 어디 있으랴. 대궁 끝에 매달린 연방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연밥을 담고 있던 연실방의 작은 구멍에는 빗물로 가득 차 있다. 훅~ 하니 슬픔이 밀려온다. 품안의 자식처럼 그렇게 꼭꼭 품에 안고 있던 것도 때가 되면 다 내어놓고 이제는 그 빈 곳에 빗물로 채우고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인가보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계절답지 않게 크게 들린다.

연실방에 담긴 빗물. 그렇다, 제 속을 비워낸 그 빈자리에 담긴 빗물 또한 얼마 있지 않으면 다시 비어지게 될 것이다. ‘빔’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려 했고, 놓아버려도 될 것을 꼭꼭 움켜쥐고 살았는가. 비면 채우고, 채우면 넘치기를 바라는 우리의 이기(利己). 빈틈없이 채우면 채울수록 가슴은 더 공허해지지 않던가. 비워내고, 놓아버려야만 가벼워지는 것을. 비워내야만 채울 수 있다는 당연한 진리를 왜 잊고 사는 것일까. 지금도 우리는.

고혜량/동랑청마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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