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51) 영혼의 산, 마나슬루의 비극
신들의 정원 히말라야 (51) 영혼의 산, 마나슬루의 비극
  • 경남일보
  • 승인 2020.12.2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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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도전’ 갈라놓은 설산의 비극

한국도로공사, 마나슬루·안나푸르나 원정대 파견
폭풍설 만나 대원 2명 조난·3명 극적 구조 후송
죽음의 비박. 윤치원 대원(서 있는 모습)이 크레바스에서 비박을 한 후 나오는 김홍빈 대원을 지켜보고 있다.


2010년 한국도로공사는 ‘위대한 도전’ 프로젝트로 네팔 마나슬루·안나푸르나 원정대를 파견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도로공사의 불굴의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원정대였다. 마나슬루(8164m)를 오른 후 곧바로 안나푸르나(8091m)까지 연속 등정하는 것이 목표였다.

박영철 단장을 중심으로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소속 김주형 원정대장, 김미곤 마나슬루 등반대장, 강연룡 안나푸르나 등반대장이 참가했으며 이동훈(행정) 대원과 차두연(통신) 대원도 선발됐다. 외부대원으로 양 손가락이 없는 김홍빈 대원과 윤치원(장비·수송), 박행수(식량·의료) 대원이 참여했다.

10년 이상 등반 전문 베테랑 참여

김주형 원정대장과 윤치원·강연룡·김미곤 대원·김홍빈 대원은 10년 넘게 히말라야를 다니며 많은 산을 등반한 베테랑들이었다. 막내 박행수 대원(29세)은 2002년 광주대학교 산악회 입회한 후 2007년 한국청소년 오지탐사대원으로 네팔과 티베트를 탐사했다. 2008년에는 마칼루를 등반하며 8000m 거봉을 밟았다.

3월 24일 카트만두를 떠나 카라반을 떠났다. 4월 1일 아르갓~자갓~필름~뎅~리히를 거쳐 마나슬루로 가는 마지막 마을인 사마가온에 도착했다. 하루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4월 3일 베이스캠프로 향했다. 사마가온 인근 주민들로 구성된 포터들은 짐을 받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포터들과 대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후 1시 BC에 도착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식당과 본부 텐트를 설치하며 본격적인 등반에 준비했다.

4월 7일 아침부터 BC가 바쁘게 움직였다. 안전한 등반을 위한 라마제가 있는 날이다. 사마가온의 오래된 사원의 스님을 모시고 안전하고 성공적인 등반을 위한 라마제를 지냈다. 대원들은 라마제가 끝난 후 짬파 가루를 하늘로 뿌리며 무사 등반을 기원했다. 이어 식량과 장비를 챙기며 첫 등반을 준비했다.

 
강연룡(맨 왼쪽)과 윤치원(맨 오른쪽)이 카라반 도중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간은 셰르파와 지원조.
눈 앞의 눈사태…가슴 쓸어내려

다음 날 전 대원들은 1캠프(5400m)에 식량과 장비를 두고 하산했다. 이들은 별 무리없이 4월 11일 2캠프(6200m)를 설치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이틀간 눈과 함께 천둥번개가 몰아쳤다.

4월 14일 강연룡·윤치원과 셰르파가 BC를 출발했고 다음 날 2캠프에 도착했다. 이튿날 1캠프에서 머물고 있던 다른 대원들은 굉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눈사태를 목격했다. 만약 등반을 계속했다면 눈사태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다. 대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연룡과 윤치원은 2캠프에서 600m 로프를 깔고 임시캠프를 설치한 후 하산했다.

4월 17일 원정대는 정상 공격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2000년 등반 경험이 있는 대원들은 3캠프(7200m)를 설사면이 시작되기 전인 6900m에 설치하는 것이 체력을 아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다른 대원들도 동의했다.

마나슬루에는 오후만 되면 눈이 내리는 등 기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22~27일 6000m 이상에서는 날씨가 좋다는 기상정보를 믿고 정상으로 향하기로 했다.

 
 
3캠프 이후 적설량 많아 고전

4월 21일 맑은 날씨였다. 김주형 원정대장·김미곤·윤치원·강연룡·박행수·김홍빈 대원, 그리고 셰르파들은 BC를 떠나 1캠프로 향했다. 위험하게 솟아 있는 얼음 기둥들을 지나며 순조롭게 올랐다. 오전 11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캠프에 도착한 이들은 다음 날 3캠프로 전진했지만 많은 눈이 내렸다. 잠시 후 폭설로 변하면서 예정보다 3~4시간 늦은 오후 3시쯤 도착했다.

기상 예보와는 달리 바람과 천둥과 번개가 몰아쳤다. 4월 22일 밤 10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새벽 4시쯤 3캠프 예정지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청빙 구간에 로프를 깔면서 오르다 보니 예상 밖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됐고 체력 소모도 많았다.

4월 23일 오전 7시 7400m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하산해서 다시 오르느냐 아니면 그냥 정상으로 가느냐?’

결국 대원들은 정상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잘못되었음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력이 좋은 강연룡이 앞장섰다. 다른 대원들도 뒤를 따랐다. 오전 11시 강연룡은 위험한 구간이 끝나는 7800m 마나슬루 라에 도착했다. 로프 작업을 마무리한 후 오후 들면서 안개가 밀려왔다. 잠시 후 윤치원이 올라왔다. 두 명은 마나슬루 라~정상 구간은 강풍에 얼음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추락 위험은 없어 그대로 통과했다. 정상을 불과 20여m 앞둔 8140m에 수직의 설벽이 나타났다. 강연룡과 윤치원은 대원들을 기다린 후 곧바로 정상에 가기로 했다.

 
청빙구간을 통과하고 있는 대원들청빙구간을 통과하고 있는 대원들
오지 않는 대원들…위험에 처한 막내 대원

한참을 기다렸지만 대원들은 오지 않았다. 김미곤 대원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무전기를 갖고 있지 않던 강연룡·윤치원은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내려온 강연룡·윤치원은 하산하는 대원들을 따라잡았다. 대원들은 전원 하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강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몰려왔다. 김미곤 대원은 기상악화로 하산하고, 김홍빈 대원과 셰르파들은 이미 내려간 이후였다. 힘들게 올라오던 박행수 대원은 김미곤의 권유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급하게 내려온 강연룡·윤치원은 하산하는 대원들을 따라잡았다. 대원들은 전원 하산 결정을 내렸다. 30분 정도 지나자 강한 바람과 함께 구름이 몰려왔다. 화이트 아웃이 발생했다. 가장 빨리 내려온 강연룡은 청빙구간이 시작되는 마나슬루 라 아래에 설치한 로프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눈이 내리고 화이트 아웃으로 로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친 박행수 대원은 눈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연룡은 한 시간 넘게 로프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로프만 찾으면 6900m의 3캠프로 하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밤 10시까지 주변을 살폈지만 로프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강연룡은 박행수를 데리고 비박할 장소를 찾았다. 그는 깊지 않은 크레바스 지대를 찾아 박행수를 밀어넣고 자신은 약 10m 아래 크레바스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으로 입구를 막고 최소한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빈틈으로 밀려오는 추위는 몸으로 견뎌야 했다.

동상·고소로 혼돈의 시간

긴 밤이 지나자 강연룡은 소리쳤다. “행수야! 내려가자.”

박행수는 대답이 없었다. 강연룡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박행수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손은 동상으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강연룡은 그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었다. 그러나 박행수는 장갑을 벗어던졌다. 강연룡은 박행수의 손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넣어 녹여주었다. 30분 후 위쪽에서 비박하던 셰르파들이 내려왔다. 셰르파들은 예비 장갑을 끼워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윤치원과 김미곤도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고 모였다. 그러나 김홍빈은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4월 25일 오전 6시 하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행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윤치원은 그의 옆에 앉혀놓고 상황을 설명했다. 강연룡은 박행수에게 자신의 장갑을 끼워주면서 동상에 노출돼 있었다.

강연룡은 박행수의 동상이 걱정돼 자신의 손가락에 동상이 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에 이상이 있다는 느낌에 배낭에 있는 예비 장갑을 꺼내기 위해 지퍼를 잡았다. 그러나 이미 딱딱하게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배낭 지퍼를 열지 못하는 극한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김주형 등반대장이 2캠프로 향하고 있다. 뒤쪽에는 강연룡 대원.
윤치원 “남은 대원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윤치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장갑을 다시 낀 강연룡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치원은 강연룡에게 말했다. “행수는 내가 맡겠다. 내가 데리고 가겠다. 연룡이 너는 먼저 내려가라.”

강연룡은 과연 동상 걸린 손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는 윤치원과 박행수를 두고 하산을 시작했다. 이미 손가락에 동상이 한참 진행된 강연룡은 고정로프를 제대로 잡을 수 없어 하산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4월 25일 오전 9시 강연룡은 해발 7500m 설사면에서 김미곤과 만났다. 강연룡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머릿속에는 과연 윤치원이 정신이 혼미한 박행수를 데리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 더이상 하산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김홍빈 대원이 셰르파 두 명과 함께 내려왔다. 체력이 거의 바닥난 그는 정신이 혼미해 가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대원들 가운데 컨디션이 가장 좋은 김미곤 대원은 청빙으로 형성된 설벽에 설치한 고정로프를 찾기 위해 한 시간이 넘도록 헤맸다. 김미곤 대원은 10m 아래 청빙지대에서 로프를 발견했다. 약간 방심한 김미곤은 피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피켈 없이 어렵게 청빙구간을 통과해 피켈을 줍는 순간 눈에 이상 증세를 느꼈다. 설맹이었다.

 
강연룡 대원이 1캠프로 향하고 있다.
7400m 지점에서 실종된 윤치원

김미곤은 비박한 다음 날 해가 떠오르는 순간 잠시 고글을 벗었던 것을 기억하고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모든 대원이 위험에 직면했다. 김주형 등반대장은 2캠프와 1캠프 사이 해발 5800m에서 비박한 뒤 베이스캠프로 먼저 하산했다.

윤치원은 탈진한 박행수를 위해 해발 7800m에 남았다. 그리고 김미곤·강연룡·김홍빈 대원, 그리고 셰르파들은 7400m에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나슬루에 몰아친 강풍과 계속되는 화이트 아웃으로 그들의 하산을 가로막고 있었다. 원정대는 청빙지역에서 벗어나 우선 해발 7000m까지 내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청빙지대에만 고정로프가 깔려 있기 때문에 로프가 끝날 때마다 다음 로프를 찾아야 했다.

강연룡과 김홍빈은 고정로프가 끝나는 지점까지 내려서기는 했지만 3캠프가 어느 곳에 있는지 방향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하룻밤을 더 비박해야 했다.

강연룡은 외국 등반대가 전년도에 깔아놓은 고정로프에 매달린 채 비박을 감행했으며 김홍빈은 그 아래쪽 설사면에서 셰르파 2명과 함께 비박했다.

4월 26일 날이 밝자 강연룡은 방향을 잡고 셰르파들이 대기 중인 3캠프로 무사히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나 아래쪽에서 비박한 김홍빈은 더욱 나쁜 상황이었다.

한편 김미곤은 고정로프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한 후 급경사 설사면에 내려섰다. 김미곤은 그렇게 3캠프에 도착했다. 그는 BC에 있던 김주형 원정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곧바로 네팔 카트만두에 있는 등반 대행업체에 구조를 요청했다.

윤치원은 마지막으로 무전을 보냈다. “행수가 숨을 거뒀다. 나도 하산하겠다.”

그러나 윤치원은 하산하지 못했다.

시신 없는 눈물의 장례식

강연룡은 장갑은 있었지만 동상이 워낙 심해 손가락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손목과 겨드랑이를 이용해 고정로프를 잡아가며 어렵게 2캠프로 내려왔다. 2캠프에서 김홍빈과 김미곤·강연룡, 셰르파 1명 등 4명은 헬기로 사마가온까지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대형 헬기로 곧장 카트만두로 후송됐다. 대원들을 사마가온에 내려놓은 뒤 윤치원과 박행수을 찾아 해발 7500m 지점을 수색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5월 10~11일 윤치원·박행수 대원의 영결식이 광주와 진해에서 시신 없이 유품으로 치러졌다.

경남산악연맹은 1999년 가셔브롬4봉 북서릉 세계 2등, 2000년 K2 남남동릉 한국 초등, 2004년 가셔브롬2봉 남동릉 한국 초등, 2007년 에베레스트 등정, 2008년 로체 등정, 2009년 마칼루·낭가파르바트 등정 등 8000m 산 6개를 오른 알피니스트 윤치원을 잃었다. 강연룡은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손가락 10개를 잃고 산을 떠났다. 윤치원과 강연룡은 10년 넘게 자일 파트너로 산을 올랐지만 그들의 우정은 마나슬루에서 끝이 났다.

박명환 경남산악연맹 부회장·경남과학교육원 홍보팀장

 
 

[취지문]

시샤팡마 신루트 개척(코리아 하이웨이루트), 에베레스트·로체 연속등정….
하지만 이런 성과 뒤에는 필설로는 형용하지 못할 고난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미친 듯이 텐트를 뒤흔드는 눈보라
세상 모든 것들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추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눈덩이
밤새도록 쩡쩡거리며 포효하는 빙하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공인의 혼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였습니다.
지난 40년 전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우리나라를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돋움케 했던 선배님들처럼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도공인은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더 많은 그런 이야기를 하도록
이번에 또 다시 세계의 지붕에 오르려 합니다.
자신감을 갖되 자만하지 않고 어렵지만 용기를 내어
한발 한발 우리의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신들이 사는 히말라야의 거봉들이 눈앞에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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