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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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0.12.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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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 요즘 발표된 경남의 소설, 수필, 순례기(8)
다음은 수필가 우광미의 <자리표>를 읽을까 한다. 필자는 모처럼 탄력 있는 수필 <자리표>를 읽고 아, 수필가들의 약진이 돋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에게 수필은 문학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느 자리에서나 말하곤 한다. 요즘 수필계는 5매수필이라는 움직임이 있고 개인적인 수월성이 돋보이는 예는 보이지만 실험이나 문학적 구성이나 문장적 특질로 수필장르의 활로를 여는 경우는 드문 것으로 읽힌다.

이런 현실에서 우광미의 <자리표>(2020, 여름 경남문학)는 한 획 점을 찍는 작품으로 필자에게 다가온 것이다. 미셀러니도 아니고 딱히 단평적 ‘에세이’’도 아니면서 그 구성의 치밀도가 있고 비유가 있고 인생론적 성찰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수필은 악기의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가 있다고 말하고 높은음자리는 바이올린이고 낮은 음자리는 첼로임을 밝힌다. 그런데 화자는 어릴적부터 익혀온 바이올린을 악기로 다룰 수 없는 불행한 처지가 되었다. 교통사고로 어깨를 다친 것이었다.화자는 음악 지도자의 권고에 따라 첼로로 연주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화자는 이에 앞서 높은음자리와 낮은음자리에 대한 음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 사는 이치에 비추어 보면 큰 것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음이 크고 작은 것에 대한 만족도는 낮은 음이 더 크다. 높은 음은 화려하게 상승하면서 돋보이기도 하고 우월감을 맘껏 발산하여 주위의 이목을 쉽게 끈다. 이에 비해 낮은음자리표에 사는 음에는 더는 내려갈 데가 없어 날선 감정의 열등의식이 잠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 잠재의식은 밖으로 분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더욱 낮은 곳으로 자신을 추락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서로를 배려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그들 나름의 은유다.”

그러면서 화자는 첼로를 시작하는 어색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첼로는 저음 악기여서 낮은음자리표를 봐야 한다. 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 낯설고 혼란스럽다. 손가락으로 음의 위치부터가 다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바이올린의 높은음을 낼 때보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만큼 오케스트라 안에서의 역할에도 부담이 덜 간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경우 첼로는 주선율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전체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낮은음에 대한 자리를 더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 “첼로는 악기와 가슴이 맞닿는다. 하향하는 살의 편린들이 겹겹이 귿어져서일까, 바이올린보다는 줄이 굵다. 버거운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라도 하듯 그 줄을 팽팽히 유지하고 있는 줄감개의 장력도 장년의 무게를 거뜬히 견뎌내고 있다. 나의 몸을 울린 음은 세상을 향해 낮고 길게 퍼져나간다. 낮다는 건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은 자민이 느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화자는 자기의 오라버니 이야기로 들어간다. 다섯아들 끄트머리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막내 여동생에게 양보하는 데 익숙한 그(오라버니).그는 어른이 되어 독립한 후에도 세상은 그를 주저앉혀 낮은음만을 읽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건축가의 꿈을 접고 빌딩 숲속 로프에 매달려 반짝이는 도시의 간판을 달았다. 높은 빌딩이 그에게는 삶의 가장 낮은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 사람들 일이라면 물먹은 솜 같은 몸일지라도 먼저 챙기는 그였다. 그래서 불편한 속내를 좀체 드러내지 않아서일까. 몸 속에서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말기가 되어서야 주변 도움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두 해를 버텼다.

그해 겨울 그(오라버니)는 화자를 찾아왔다. 그땐 이미 곡기를 끊고 있었다. 일주일간 마련해 둔 숙소에서 깊은 침묵에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가던 날 ‘부탁할게’라며 통장을 내밀었다. 그것의 의미를 짐작한다. 그 깊은 침묵이 화자에게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뭐라 해야 할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진부한 말밖에. 언어의 한계성을 넘어설 수 없는 가난함이 화자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했다. 이 시대의 아버지라는 숙명을 짊어진 사람.

그가 떠나고 난 다음날, 오전에 전회를 받았다. 별이 을린 후에야 그가 받았다. 뭐든 좀 먹었느냐는 물음에 “그래 먹었어.”라고 대답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어제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그 음성엔 한없는 평온함이 있었고 따뜻함까지 풍겨나왔다. 그러고 두어시간이나 되었을까. 전화가 왔다.

“고모.......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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