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랑
사랑과 사랑
  • 경남일보
  • 승인 2020.12.23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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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영 (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자호란 때 청군에게 강화도가 함락되자 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은 배를 타고 달아나고, 늙은 상신 김상용이 문루에 화약 더미를 쌓아놓고 화약궤에 걸터앉아 불을 붙여 자폭했다. 성균생원 김익겸과 빙고별좌 권순장이 “상공은 혼자 좋은 일을 하십니까?” 하면서 곁을 지켰고, 김상용이 종에게 13살 손자 김수전을 데리고 피하라고 했으나 손자는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고 하고 종도 가지 않아 모두 함께 폭사했다.

김상용은 척화신 김상헌의 친형이고, 김익겸은 김만중의 아버지다. 당시 김만중의 어머니는 5살 아들 김만기를 데리고 배를 타고 피하던 중 배 위에서 출산하여 김만중의 어릴 적 이름이 선생(船生)이다.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이고 일찍 죽어 두 번째 정비가 인현왕후로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의 주인공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장면에 축약된 역사적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 나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흔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임이 그리워 잠도 못 이루는데 임이 꿈속에 온다고 하니 거짓말 아니냐는 내용도 절창이지만, 지은이가 김상용이기에 더욱 뼈에 사무치는 듯하다. 자신의 최후를 애국에 바친 사람이니 그런 사랑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 오백 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원천석) //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길재)

두 편의 시조는 멸망한 고려를 회고하는 맥수지탄이다. 망국에 대한 사랑은 아픔과 함께 가슴에 묻힌다.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흘러들어 /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 아희야 고국흥망을 물어 무엇하리오

이 시조를 쓴 정도전도 고려의 신하였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역성혁명을 주동한 변절자이겠지만, 조선의 창업공신으로 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이다. 새 정치를 꿈꾼 혁명가로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었으니 새 시대를 향한 그의 사랑 또한 애절하고 파란했던 셈이다. 흥망이 유수한데 망한 고국만 그리워하지 말고 새 역사의 흐름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개성을 돌아보는 심회에 담겨 있다.

거시사적인 사랑과 미시사적인 사랑이 일치할 수는 없지만 근본은 같은 마음이다. 뒤돌아보는 사랑과 맞이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가는 해도 사랑이요 오는 해도 사랑이니.

김성영/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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