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13]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113]
  • 경남일보
  • 승인 2020.12.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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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과 퇴계 선생
 
◇구맹주산의 시대를 산 남명과 퇴계

송(宋)나라 사람 중에 술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는 되가 아주 공정했고, 손님에게 아주 공손하게 대했으며, 술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 술맛도 일품이었다. 술도가임을 알리는 깃발도 아주 높이 걸었지만, 술은 팔리지 않고 모두 시어져 버렸다. 그 이유를 이상히 여겨 평소 알고 지내던 양천이란 어른께 술이 잘 팔리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양천이 “당신 집에 기르는 개가 사나운가?” 하고 묻자, 술도가 주인이 “예, 개가 좀 사납기는 합니다만 개가 사나우면 어째서 술이 팔리지 않는 겁니까?”하자, “사람들이 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네. 어떤 사람이 자식을 시켜 돈을 품에 넣고 호리병을 손에 들고 술을 받아 오게 했는데, 개가 달려와서 그 아이를 물었다네. 이것이 술이 시어질 때까지 팔리지 않는 이유라네.”하고 양천이 대답했다.

이 고사는 한 나라에 간신배가 설치면 선량한 선비가 임금 곁에 오지 않거나 조정에 있던 선비도 떠나버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조선 중기에도 사나운 개가 조정과 궁궐에 있었으니 가장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와 그 일당들이다. 이러한 구맹주산(개가 사나우면 술이 시어지고, 간신배가 설치면 선량한 선비들이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는 세태)의 시대에 산 남명 선생과 퇴계 선생의 삶이 어떠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경상우도인 진주를 근거지로 남명학파를 형성한 남명 선생, 경상좌도인 안동을 근거지로 퇴계학파를 형성한 퇴계 선생은 ‘좌 퇴계, 우 남명’이란 말이 생겼을 정도로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룬 학자들이다. 이 두 학자의 삶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멀구슬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는 남명생가, 뇌룡정, 용암서원 그리고 의령군에 있는 덕곡서원과 가례동천을 찾았다.

 
 
◇자굴산 북쪽의 남명과 남쪽의 퇴계

성호 이익 선생은 ‘성호사설’에서 ‘경상좌도는 인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를 주로 한다.’라는 말로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의 학문적 특성을 한 마디로 평가했다. 두 분은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남명 선생은 자굴산 북서쪽 자락인 삼가면 외토리 외가에서 태어났고, 안동에서 태어난 퇴계 선생은 21세 때 자굴산 남동쪽 자락 가례마을 출신인 허찬의 딸과 혼인을 했다. 이로 인해 성리학의 두 거봉이 자굴산을 배경으로 인연이 맺어지게 된 셈이다.

승용차로 진주에서 20여 분을 가면 삼가 외토리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남명교 지나면 오른쪽 들판 가운데에 뇌룡정과 용암서원, 용연사가 천산갑 등껍질 같은 기와를 덮어쓰고 겨울 추위를 견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외토리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남명 선생 생가 입구에 새로 만든 주차장이 널찍하게 펼쳐져 있었다. 생가 복원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기와로 인 집 네댓 채를 새로 지어 놓았다. 복원이 아니라 재건축이었다. 소박하게 사셨던 선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탄생과 삶을 떠올리게 했다. 다행히도 집 뒤란 쪽에 우뚝 선 굴밤나무와 장독대, 담장 밖 거목으로 자란 팽나무 한 그루가 옛집의 정취와 남명 선생의 호연지기를 느끼게 했다. 선생이 태어나던 날 우물에서 무지갯빛이 뻗치어 온방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생가 아래쪽 주차장 입구에 새로 만든 우물은 선생의 탄생 때 서린 상서로운 기운을 담아두려고 한 것 같았다.

생가에서 내려오니 양천강이 태극모양으로 들녘을 에돌아 산기슭을 따라 흘러가고, 들녘 가운데 선 용연사를 지나 남명 선생을 추모하면서 강학활동을 하던 곳인 용암서원을 찾았다. 서원 앞에는 남명 선생의 단성소 전문을 새긴 큰 빗돌이 서 있었고, 그 옆에 남명 선생상을 세워 놓았다. 남명 선생이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이를 사직하면서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조정을 농단한 문정왕후를 궁중의 과부라 지칭하며 정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 세찬 겨울 추위에도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용암서원 바로 아래 뇌룡정이 있었다. ‘뇌룡(雷龍)’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은 유래가 주련(柱聯)에 있었다. 장자에 나오는 ‘연묵이뢰성 시거이용현(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치며,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을 닦으며 제자들을 육성한 뒤 61세 되던 해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돌아가실 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남명 선생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 남명교에서 바라본 양천강 물과 외토리 마을 하늘은 정말 푸르렀다. 푸른빛, 남명 선생의 지절이 서려 더욱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계 선생이 살고 싶어했던 가례동천

덕곡서원이 있는 의령읍 하리까지는 차를 타고 10분 남짓 걸렸다. 안동 도산에서 태어난 퇴계 선생이 의령 가례 출신의 처자와 혼인을 맺은 뒤, 9차례에 정도 의령 가례를 다녀갔다고 한다. 부인 허씨가 혼인한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처가를 알뜰히 잘 보살폈던 퇴계 선생은 처가에 머물 때 지역 선비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유람도 했는데, 퇴계 선생은 가례마을의 풍경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가례동천이란 말을 큰 바위에 새기기까지 했다. 이런 인연으로 후대 지역민들이 덕곡마을에 퇴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덕곡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서원에서 자굴산 쪽으로 4~5분 차를 타고 가니 가례마을이 나왔다. 도로변에 세워놓은 가례동천 안내석을 따라 들어가니 익살스럽게 그려놓은 벽화들이 탐방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붕 낮은 집들끼리 모여 참 따사롭게 살고 있었다.

퇴계와 남명, 두 분은 평생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로 존경하면서 정신적으로 교유했다고 한다. 남명 선생은 초야에서, 퇴계 선생은 조정에서 각각 간신배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가치를 펼치며 살아왔기에 지금도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북 남명, 남 퇴계를 북돋운 자굴산 등성이에서 눈부신 햇살이 따사로이 내리쬐고 있었다.



/박종현 시인, 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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