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는 시간
뒤돌아보는 시간
  • 경남일보
  • 승인 2020.12.3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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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영 (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겨울이 깊어가는 한 해의 끝자락. 아련하게 멀어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나날들을 뒤돌아보게 된다. 25년 전 가을 어느날, 아늑한 숲속에서 4살인 첫아이는 낙엽 속의 도토리를 모으며 놀았다. 동화 속 같은 시간을 누리고 숲을 떠날 때 아이는 도토리 더미를 낙엽으로 덮었다. “남익아, 도토리를 본래대로 흩어 놔야지 왜 한 군데다 모아뒀니?”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요, 어차피 이 숲의 다람쥐들이 나눠먹을 텐데, 처음 발견하는 다람쥐 엄청 기분 좋으라고요.”

그해 겨울 어느 일요일,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TV를 보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아빠, 저 아이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없는 거예요?” ‘왕초’라는 드라마의 재방송으로,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열댓 명의 고아들과 함께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렇단다.” 간단히 대답하고 다시 신문에 몰두하는데 아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익아 왜 그러니?” 대답 대신 아이의 훌쩍이는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결국 목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가슴이 저렸다. 아이의 측은지심이 뼛속에 사무쳤고, 앞으로 그 아이가 살아갈 긴긴 날들이 걱정스러웠다.

거기서 다시 25년 전. 내가 5학년이던 한겨울, 추위가 혹독했던 이른 아침이었다. 밥솥과 국솥의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데, 어머니 나이쯤의 낯선 여인이 마당에 들어섰다. 기색은 초췌했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코트를 걸쳤고 매우 고운 얼굴이었다. 와들와들 떨면서 들어선 그녀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아궁이 앞에 앉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밥 좀 주세요.”

서울 억양에 예사롭지 않은 외모. 이른 아침 외딴 농가에 찾아든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세상이 새삼 더 춥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펄펄 끓는 국부터 얼른 한 그릇 떠서 건네자, 그녀는 그 뜨거운 국을 허겁지겁 둘러마시다시피 했다. ‘천천히 드시소. 목구녕 디것다’라고 했을 뿐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또 한 그릇의 국과 밥 한 그릇을 비운 그녀는 고맙다며 수차례 절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아직도 간혹 생각나는, 참 추운 겨울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아이는 지난 가을에 객지에서 새내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며칠 전 그 아이의 스물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각기 바쁜 데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문자로만 축하했다. 문자에도 하지 못한 말, 따뜻하면서도 부디 강하게 살아가기를….

연저지인이 세상살이에 유리한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측은지심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냥, 또 한 해가 저문 시간에 떠오른 상념이다.

김성영/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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