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2]스웨덴 바사 박물관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2]스웨덴 바사 박물관
  • 경남일보
  • 승인 2021.01.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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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척의 배 만을 위한 공간
언제부턴가 국내에도 북유럽 스타일 인테리어, 패션이 유행하면서 북유럽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 많은 관심이 집중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곧 북유럽 브랜드의 관심으로 확대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스웨덴 대표 기업인 이케아(IKEA)나 에이치엔앰(H&M)은 현재 우리나라 가구, 패션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심플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은 물론이고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운 이 브랜드들은 북유럽감성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젊은 층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웨덴과 한국을 오가는 직항이 없어서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조금은 덜 한 편이지만 스웨덴에 대한 여행객들의 관심은 꾸준히 증대되고 있다.

스웨덴은 유럽연합(EU)의 식구임에도 불구하고 유로가 아닌 ‘크로나’라는 자국 화폐를 사용하며,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특성으로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와 더 자주 언급된다. 그러고 보니 이들 국가의 국기 문양도 색깔만 다를 뿐 전부 십자 모양을 하고 있다. 덴마크를 시작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퍼진 기독교의 영향으로 북유럽 국가들의 국기가 비슷해진 것이다. 비가 자주 오는데다 여름철에도 일교차가 커 얇은 외투를 챙겨야 하는 스웨덴의 날씨 때문에 체류기간 내내 우중충한 하늘과 비를 만났다. 그러나 스톡홀름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 겨우 만난 파란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일 년 내내 쉽게 볼 수는 없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스톡홀름의 풍경이라면 스웨덴 사람들도 그 긴 겨울을 무엇 때문에 견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이름은 바사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스톡홀름 항구에서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첫 출항을 했던 배가 망망대해를 누비지도 못한 채 침몰하고 말았다. 영원히 바다 속에서 잊혀 질 줄로만 알았던 비운의 배는 333년 후에 귀중한 유물이 되어 물 위로 떠올랐다. 배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역사학자 덕분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 항구로 모여들었고, 인양과정은 TV를 통해 생중계되기도 했다.

스웨덴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배의 이름은 바사(VASA).

현재 바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배를 구경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람객이 몰려든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사박물관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박물관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바사호는 왜 침몰 하였을까? 그리고 이 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는 바사박물관의 관람은 의미 있는 스웨덴 여행의 연장선상이며, 스웨덴의 역사까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바사호는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프 아돌프 2세의 명령으로 전쟁에서 사용하기 위한 군함으로 건조 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국가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고 강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스타프는 교육을 매우 장려했다. 또한 경쟁 국가였던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 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국력을 기르는데 힘썼다. 구스타프는 네덜란드 출신 형제가 운영하는 조선소와 4개의 선박 건조를 계약했는데, 그 중 한 대가 바사였다. 네덜란드는 일찍부터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 발달 되어 있었으며 건조를 명령받은 배들은 구스타프와의 협의를 거쳐 네덜란드에서 2000년 동안 사용되었던 건조방식을 따라 만들어 졌다.

 
 
◇바사호의 침몰

바사호가 첫 출항을 하던 날, 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바사호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해안가로 모여들었고 갑판 등 화려하게 장식되어져 외관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

그러나 150여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한 바사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런 돌풍을 만났고 휘청이기를 반복하다가 침몰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인양된 바사호를 연구 분석 해본 결과, 바사호는 처음 건조 될 때부터 많은 착오와 오류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닷물에 잠기는 선체의 비중이 배 전체와 비교했을 때 너무 작았고 그로 인해 배의 무게중심의 높아지면서 안정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좌현이 우현보다 무겁게 건조가 되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와 스웨덴 기술자들이 쓰던 기준자의 길이가 서로 달라 비대칭 모양이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항해 시 닫혀져 있어야 했던 아래 포문이 열려있던 것도 침몰의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수 백년 전 침몰한 바사호가 어떻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박물관에 전시 될 수 있었을까?

최초의 발견자인 앤더스(Anders Franzen)는 17세기 문서들을 토대로 바사호가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를 끊임없이 탐사 했다. 이전에도 바사호를 찾기 위한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 존재를 입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앤더스는 바사호의 잔해를 찾기 위해 해저탐사기기를 직접 제작하여 잔해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염분이 낮은 스톡홀름 항구 앞바다에는 조개류가 서식할 수 없어서 오랜 시간 선체가 바다 속에 있었지만 세월에 비해 부식이 덜 진행될 수 있었다. 1956년 앤더스는 바사호의 갑판을 만드는데 사용된 검정 참나무의 잔해를 찾았고, 바사호가 가라 앉아 있다는 것을 입증 할 수 있었다. 스웨덴 정부는 1957년부터 인양을 위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선박 밑으로 터널을 뚫어 강철케이블을 통과 시킨 후 해수면 위에 떠있는 바지선에 연결하는 작업을 여러 차례 시도 한 끝에 1961년 인양에 성공했다.

 
 
◇인양 그 이후

바사호는 인양과 동시에 보존 작업이 매우 중요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인양작업보다 보존 작업이 훨씬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큰 자본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끌어낸 바사호이기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림이나 기록이 아닌 실제 함선을 눈으로 마주하며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인양성공이 가져다준 엄청난 행운이자 기회였다.

바사호가 박물관에 전시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것들이 미래의 표본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선체에 물을 뿌리는 작업을 계속하여 배의 갈라짐을 막고, 9년간의 건조 과정을 거쳐 보존제를 17년 동안 도포했다. 바사호 이전까지는 선박을 보존해야 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배를 건조 및 보존하는 방식이 다른 선박의 길잡이가 될 것을 염두하여 더욱 신중한 연구가 진행 되었다.

복원 이후 바사호를 박물관에 전시하는 과정에서도 꾸준한 연구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시가 시작되며 선체에 400개 이상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 할 수 있는 장치를 부착하여 뒤틀림을 방지하고 있으며, 온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하여 공기 접촉으로 인한 부식을 막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



주소: Galarvarvsvagen 14, Stockholm

운영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5시

입장료: 170 크로나 (한화 약 2만3000원)

홈페이지: www.vasamuseet.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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