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과 국척
방심과 국척
  • 경남일보
  • 승인 2021.01.1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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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영 (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춘추시대 오자서와 손무를 얻어 왕위에 오른 뒤 강국 초나라를 초죽음으로 만들고 패자(覇者)를 자처하던 오왕 ‘합려’는 뒤통수를 건드리던 월나라를 친다. 순식간에 패망의 위기에 몰린 월나라는 성을 굳게 닫고 꿈쩍도 않는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책사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비장의 카드를 제시하는데…, 전시에 험한 일을 도맡아 하던 종군 사형수 60명에게 가족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약조하고는 짤막한 비수 하나씩 지급한다.

성문이 열리고 음악에 맞춰 60명의 죄수부대가 행진해 나오자, 밖에서 야유하며 노닥거리던 오나라 병사들의 이목이 쏠린다. 3열 횡대로 도열한 죄수부대 제1조 20명이 1보 앞으로 나서서 월나라 말로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는 한 명씩 비수를 목에 박고 고꾸라진다. 눈이 휘둥그레진 오군들의 넋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제2조 20명, 제3조 20명…, 오자서가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지만 이미 늦었다. 60명이 자살 퍼레이드를 펼치는 동안 몰래 성을 빠져나온 월나라 군대가 오군 진영을 포위, 기습한 것이다. 오군은 지리멸렬하고, 그 와중에 합려가 부상을 입고 독이 퍼져 죽는다. 아들 ‘부차’는 와신으로 복수에 성공하지만 방심과 오만에 빠진 탓에 상담으로 재기한 ‘구천’에게 패망하고 만다. 범려의 섬뜩한 작전을 보자는 게 아니다. 와신상담의 고사가 방심에서 시작됐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방심이 늘 문제를 일으킨다. 지구상의 2020년 한 해를 통째로 휩쓸고 2021년까지 접수하려는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이다. 이 미물에게 눈부신 문명을 이룬 만물의 영장 인류가 맥없이 전방위로 당하고 있다. 생명 아닌 것들이 생명을 죽인다는 말이 실감나는데, 여러 가지 난제들이 얽혀 있지만 기본은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다.

권근의 수필 ‘주옹설(舟翁說)’도 주제가 같다. 어부도 아니고 뱃사공도 아니면서 위험한 물 위에 사는 까닭을 묻는 손(客)에게, 땅 위에서는 방심하기 쉽다며 주옹이 대답한다. “위험한 물 위에서 늘 경계하고 조심하며 살기에 오히려 평온하다.”

하늘에 닿을까 봐 머리 허리를 굽히고 땅이 꺼질까 봐 살살 걷는다는 ‘국천척지’라는 말은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가리키지만, 현 시점에서는 방심보다는 국척이 나은 상황이다. 주옹처럼 지극히 조심하는 자세를 일상생활로 습관화하되, 단순한 거리두기를 넘어 계층 간 직종 간 배려를 통해 공동운명체로서 더불어 살기의 길을 함께 찾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제각기 다양한 자리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김성영/시조시인·청명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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