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에게
나도 누군가에게
  • 경남일보
  • 승인 2021.01.2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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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량 동량청마기념사업회이사
 

산에 오른다. 집 가까이에 두고도 산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산은 언제나 내게 바라만 보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은 산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일곤 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에서 뒹굴던 옷차림 그대로 운동화만 신고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바깥에서 바라만 보던 산과 그 속을 걸으며 느끼는 산의 차이는 컸다. 몇 그루되어 보이지 않던 편백나무가 실제로는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피톤치드가 많은 나무라하니 볼을 한껏 부풀리며 숨을 들이켜 본다. 마치 양 볼이 터질 듯 입안에 도토리를 가득 채운 다람쥐처럼.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집 앞에 있는 산이라고 만만히 보고 산책삼아 걸어볼 요량으로 오른 것이 잘못이었나 보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참지 못해 그루터기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이미 차 소리, 사람 소리는 끊어진지 오래다.

바람이 숲을 더듬는다. 바싹 말라버린 잎이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다. 바람이 마른 잎을 스칠 때마다 들려오는 무욕의 바람소리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사찰 추녀 끝에 매달려 저 혼자 ‘뎅그렁’ 그리는 무심한 풍경소리를 닮았다. 바람이 한껏 물오른 녹색의 잎을 스칠 때 들려오는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다. 산을 오르는 데만 열중하여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과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 그동안 너무나 잊고 살아온 소리들이다.

가을이 지는 날들이 원래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흠 없이 앙증맞은 솔방울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다 보니 얼마쯤 안으로 들어왔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몇 년을 같은 길로 다녀도 내비게이션 없이는 잘 찾아가지 못하는 길치다보니 왠지 불안해진다. 주위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거린다. 길이 희미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기를 몇 번이나 했다.

마음이 바빠지니 느긋함을 느낄 여유가 없다. 기차의 레일처럼 반듯한 길이라면 좋으련만 본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가 아닌 탓에 헷갈리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 톱아보니 길인 듯 아닌 듯 풀이 누워있는 흔적이 보인다.

속긋! 그래 어린 날 우리가 글씨연습을 할 때 서투른 솜씨로 속긋에 따라 쓰기 한 것처럼 앞선 간 사람들의 수많은 발자국들로 다져진 길이 속긋이 되어준다. 산을 내려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속긋이 되어야 한다.’

고혜량/동량청마기념사업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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