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파괴가 예삿일이 된 나라
원칙파괴가 예삿일이 된 나라
  • 경남일보
  • 승인 2021.01.2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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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모 논설위원
0이 무한대가 되는 궤변 논리가 있다. χ=0일 때, 0의 제곱도 0이므로 χ=χ²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양변을 χ로 나누면 χ는 1. 따라서 (χ+χ+χ…)는 (0+0+0…)이면서 (1+1+1…)도 된다. 곧 0은 음양의 온갖 수가 다 될 수 있고 급기야 0=∞라는 말도 틀리지 않는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이 요술 같은 등식의 함정은 무엇인가. 어떤 수도 0으로는 나누지 못한다는 원칙의 파괴다. 허물어선 안 될 원칙은 국가사회에도 있다.

나라에는 건전재정주의 원칙이 있다. 세출은 국채·차입금 이외의 세입을 재원으로 한다는 기채 금지의 원칙과 남은 재정으로는 빚부터 갚는다는 감채의 원칙이다. 요컨대 빚 억제하면서 나라살림을 꾸려야 한다는 거다. 한데 올해 국가채무는 10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홍남기 부총리). 2019년 말에 비해 2년만에 무려 271조원이 불어나는 셈. 근래 우리에게 익숙해진 현금 복지 같은 마구잡이 포퓰리즘에 기인하는 바가 클 테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최근 자영업의 코로나 손실보전을 제도화하라고 했다. 기획재정부가 이를 법제화한 나라는 없다고 하자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총리의 나라일까.

대통령 취임사는 임기 중의 자기 원칙이다. 문 대통령은 그 원칙을 여러 번 저버렸다는 소리를 듣는다. 신년기자회견을 계기로 또 회자된, 국민과의 소통을 안 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은 취임할 때 국민과 수시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할 거라고 했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시민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광화문광장에서 토론회도 열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키지 않았다. 기자회견도 1년간 거의 없었다. 코로나 탓을 댔고 다른 방법으로 많이 소통했다고 했다. 국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취임사에서 약속한 분열과 갈등의 정치는 없앴는가. 강조한 대로 보수와 진보의 갈등 끝내기에 노력했는가. 언급처럼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보고 수시로 만났는가. 인사를 전국적으로 고르게 등용하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나. 지지자가 아니어도 유능한 인재를 찾아 삼고초려한 적이 있는지 사람들은 묻고 있다. 물으면서 속으로 그간 대통령의 인사 경향과 작금 신임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국회청문회를 반추해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정부 인사 5대 원칙’을 내걸었다. 위장 전입, 논문 표절, 세금 탈루,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자 배제다. 이 중 하나라도 걸리면 고위공직자로 쓰지 않겠다고 했다. 검증에서 걸린 후보들은 임용에서 탈락했는가. 청문회 덕에 장관들의 5대원칙 위반 사실을 국민들은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예외 없이 임명장을 받는 것도 보았다. 여지없는 원칙의 파괴였다.

더불어민주당원이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이 성추행 사건으로 궐위 중이다. 두 보궐선거에 민주당은 후보를 낸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당헌을 고쳤다. 고치기 전의 원칙은 후보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당 소속 공직자의 잘못으로 치르는 재·보궐선거에 후보를 안 낸다는 당헌 규정이 있었던 거다. 더욱이 이 조항은 문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주장하여 세운 원칙이다. 대통령은 회견에서 헌법도 국민의 뜻에 따라 바꾸는 것이라며, 당원들이 원했으므로 그 뜻을 존중한다고 했다. 원칙 파괴의 명분이 ‘당원의 뜻’이다. 그러하다면 대통령과 여당은 과거 박정희의 유신헌법과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도 긍정하는 입장일까.

원칙은 일관되게 지키려 노력하는 게 기본이다. 기본을 외면하고 원칙을 파괴하면 0이 무한대가 되는 데서도 보듯 무질서 상태가 된다.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거다. 지금 그런 모양새의 일단(一端)을 김학의 전 법무차관 출국금지 사례 같은 데서 보고 있다. 예삿일이 된 원칙 파괴, 걱정스럽다.
 
정재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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