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서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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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1.02.0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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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국 (전 진주교육장)
 

예부터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첫 절기 2월 초 입춘이 되면 입춘서, 입춘방을 써붙였다. 이는 성종13년(1482)에 임금이 글을 지을 줄 아는 이도 많으니 입춘을 맞아 각자 글을 써 대문에 붙이라고 한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입춘 열흘 전에 승정원에서 문신들에게 시를 짓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이나 용(龍), 호(虎) 글자를 거꾸로 붙이기도 했다. 후세에는 백성들도 입춘서를 붙여 두는 관습이 내려와서 대문에 흔히 ‘입춘대길’(立春大吉)과 짝이 되는 글귀로 ‘소원성취’(所願成就),나 ‘만사형통’(萬事亨通)을 썼다.

그러나 요즘 보면 대문 양 쪽에 ‘입춘대길’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을 많이 붙인다. ‘입춘대길’의 유래는 선조 26년(1593년)승정원에서 임진왜란 후 민심을 안정을 위해 행궁에 붙이기를 건의해 쓰게 됐다. ‘건양다경’은 양력을 쓰면 경사로운 일이 많다는 4자성어이다. 건양은 고종 33년(1896년)연호로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건양다경’이란 말이 퍼져 씌어졌다. 건(建)은 건물을 세우는 것이고 양(陽)은 햇볕이나 양력을 말한다. 양력을 사용하는 것을 일본식으로 건양(建陽), 우리식으로는 용양(用陽)이다. 옛말에 ‘적선지가 필유경’(積善之家必有慶)이라는 말은 있어도 ‘건양다경’은 사전에도 안 나왔다. 옛 선비들은 이 말은 성립하지 않고 가소로운 말이라 해 쓰지 않았다.

고종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갑오년(1894년)에 청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부왜인(附倭人)을 앞세워 우리 내정을 간섭해 군국기무처라는 조직을 만들고 일본식 법을 강요했다. 이듬해 을미년(1895년) 8월 민비 시해만행이 있은 뒤 내부대신이 된 유길준이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한다고 고시했다. 즉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1896년 양력 1월 1일이 된다.

다음해 병신년(1896년) 2월 고종 임금은 아라사공관으로 파천해 민비시해 역적 체포령을 내렸다. 그 때 유길준, 조희연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정유년(1897년)에는 고종 임금이 러시아공관에 환궁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연호는 1년 만에 광무로 바꿔 버리고 자신의 문집에도 건양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입춘을 맞아 잘 알지 못하고 사용했던 ‘건양다경’ 같은 글귀는 버리고 대신 고유한 아름다운 전통을 살려 ‘입춘대길’ 에 ‘만사형통’이나 ‘소원성취’를 대련(對聯)으로 내걸었으면 한다.


조헌국/전 진주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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