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맞이하면서
설날을 맞이하면서
  • 경남일보
  • 승인 2021.02.0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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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국 (전 진주교육장)

우리민족은 새해가 되는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고 했다. 새해 첫 달을 정월(正月)이라고 하면서 바르게살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갑오년 1894년 이후 일본 세력을 업고 날뛰던 무리들에 의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 때 내부대신이 된 유길준이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사용한다고 고시하며 을미년 1895년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이 된다고 했다. 억지로 1896년부터 양력을 쓰게 하고 양력 1월 1일을 설날로 지키라고 했다. 하지만 명망 있는 집안에서 음력 정월 초하루 날에 설날제사를 지냈다. 집안에서는 술을 담가 썼는데 일제는 1939년에 설날제사 금지령을 내리고 민간에서 술을 담가 먹는 것을 밀주(密酒)라고 하면서 단속했다. 밀주를 핑계로 설날제사를 막으려고 한 것이다.

동국세시기에서는 설날 서울 풍속으로 가묘(家廟)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를 차례(茶禮)라 한다고 했다. 조선 왕실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할 때 궁중다례를 행했고 다례상을 차려 대접했다. 그런데 서울 사람들이 설날 가묘에서 차례를 했다고 하면서 일본식으로 차례라고 읽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요즘도 모르고 차례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가묘에 올리는 것은 천물(薦物)이라 하고 수시로 올렸다.

한때 우리가 지키던 고유한 명절, 새해 정월 초하루 설날을 음력설이라 하고 양력 1월 1일을 양력설이라 구별하기도 하고 양력설을 신정(新正), 음력설을 구정(舊正)이라고 되지도 않는 말을 쓰기도 했다. 양력설만을 쇠도록 강요하면서 그날만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후 1985년 정월 초하루 설날을 ‘민속의 날’이라고 한 뒤 1988년부터 설날이 명절로 3일 공휴일로 하면서 제자리를 찾았다.

설날이면 조부모, 부모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올렸다. 선조들은 ‘과세(過歲)편히 했는가?”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고 새해 인사 글귀로는 ‘기원성취’(祈願成就)를 써주었다.

또 경술국치 이후 새해를 맞으면서 이완용을 비롯한 부왜인(附倭人)들이 일본인 조선 총독이나 관리들과 사귀기 위해 일본 풍습을 따라서 ‘근하신년’(謹賀新年) 이라는 말을 써서 연하장 엽서를 보내는 풍습이 생겼다. 근하(謹賀)와 신년(新年), 따로 있던 두 단어를 붙여 쓰면 그 말은 ‘삼가 새해를 축하 한다’는 말이 된다. 축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용어인데 새해에게 축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일본풍이 우리 전통인 양 이어져 오고 있다. 민족의 전통은 온고지신의 정신에 근거해 창조적으로 계승됐으면 한다.

 
조헌국/전 진주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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