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풀잎을 흔들어 깨우기
잠자는 풀잎을 흔들어 깨우기
  • 경남일보
  • 승인 2021.02.1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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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경남람사르환경재단대표)
벌써 우포늪으로 잠자리를 옮긴 지 석 달이 되었다. 새벽 우포가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사무실과 정반대 편인 이방면의 목포 옆에 방을 구했다. 기대했던 대로 커튼만 열면 늪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출근할 때는 아침 8시쯤 집을 나서서 목포제방 쪽으로 둘러보고, 퇴근할 때는 대대제방 쪽의 한터들판을 가로질러서 온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포를 한바퀴 도는 셈이다.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퇴근길에 잠수교를 지나 사지포제방 쪽으로 가고 있는데 눈앞에 고라니가 나타났다. 빛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캄캄함 밤중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낯선 불청객이 궁금한 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온몸이 찌릿찌릿 했다. 말로만 듣던 야생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놀라움과 기쁨이 나를 에워쌓다. 나도 바라보기만 했다. 뒤늦게 사진 찍으러 했을 때 고라니는 건너편 늪으로 사라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고라니와 눈을 마주쳤다. 자기 생활 구역을 침범한 나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잠수교 근처에서 여러 번 만났다. 우포를 다닐 때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소리내지 않으려고 조심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부터 여러 곳에서 심심찮게 고라니, 오소리, 수달 등을 보게 되었다. 사지포에서는 멧돼지가 땅을 파헤쳐 놓은 곳도 있었고, 장재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는 외딴 숙소에서도 놀라서 후다닥 도망치는 고라니를 보기도 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야생의 세계에 한 발짝 들어선 것이다. 처음 만나는 새로운 세계에 어울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교 다닐 때 생물시간에 동식물의 이름만 달달 외우던 방식으로는 안될 것 같았다. 우리에 갇힌 동물, 온실에서 보기 좋게 키운 꽃을 그냥 지나가면서 감상하는 도시인의 힐링 자세는 야생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공존, 공생이 아니라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에 놓고 있는 한 자연과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시인 정희성이 쓴 ‘민지의 꽃’에는 꽃과 이야기를 나누는 민지가 등장한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 다섯 살배기 딸 민지 /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 질경이 토끼풀 억새… / 이런 꽃들에게 물을 주며 /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 내 말은 때가 묻어 /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민지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이 생태적 감수성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70 평생을 없이 살았는데 없는 감수성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어떻게 길러야 할지 막연하다. 과연 가능이나 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시인 나태주를 흉내 내보기로 했다. 시인 나태주는 풀꽃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까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풀꽃’에서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사람이 꽃같이 보였는데 점차 꽃이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이제부터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이름도 알아야겠다.

 
전점석(경남람사르환경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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