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5]덴마크 국립 미술관
김수현의 박물관 편지[55]덴마크 국립 미술관
  • 경남일보
  • 승인 2021.03.17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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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Baerentzen (1799-1868), Familiebillede, 1828
어릴 적 ‘인어공주’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인어공주의 결말은 여느 동화들과는 달리 공주님과 왕자님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왕자를 죽여야 하는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이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물거품이 되는 인어공주 이야기는 많은 어린이의 동심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후 디즈니사에서 왕자와 공주의 해피앤딩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그렇게 인어공주는 내 마음속에서 잊혀져갔다. 그리고 인어공주를 다시 만난 것은 20년이 지난 코펜하겐의 어느 바닷가에서였다.

어른이 되면서 동심은커녕 순수한 마음조차 남지 않게 되어서일까. 홀로 앉은 인어공주 동상은 서른 살이 훌쩍 넘은 내 눈에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인어공주를 머나먼 코펜하겐에서 만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를 탄생 시킨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이 덴마크 출신이기 때문이다. 해안가에 있는 동상은 카메라를 확대해야 겨우 생김새를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데다가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란 더 더욱 힘들었다.

동상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이가 나 뿐만은 아니었는지, 인어공주 동상은 전 세계의 유명 관광지 중에 실제로 보면 실망하는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그러나 코펜하겐 관광을 인어공주 때문에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상인의 항구’라는 뜻을 지닌 코펜하겐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와 인접한 위치적 특성 때문에 도시곳곳에서 다양한 요트와 선박을 볼 수 있다. 특히 운하 위를 다니는 작은 크루즈를 이용하면 코펜하겐 모습을 두루 감상 할 수 있는데, 도로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을 물 위에서 올려다보면 더욱 인상 깊고 아름답다. 코펜하겐의 모습은 옛것을 추구하는 고풍스런 신사의 느낌 보다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여성의 느낌이 강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흔들리고 있는 덴마크 국기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듯 했고, 문득 이런 덴마크다운 면모는 어디서 왔을까에 대한 의문이 밀려왔다.



◇덴마크 미술의 황금기

어쩌면 덴마크 미술은 우리 모두에게 생소 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교과서나 교양서에서 덴마크 미술에 관해 집중해서 다루지 않는데다가, 일상에서 빌헬름 벤즈(1804-1832), 콘스탄틴 한센(1804-1880), 크리스텐 쾨브케(1810-1848)와 같은 화가의 작품을 접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는 덴마크 미술의 독자적인 발전이 다른 나라 보다 늦어서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이름난 화가를 배출하기 어려웠던 국가적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 중엽까지 덴마크의 회화는 교회를 장식 하는 프레스코화에 집중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사실상 종교화의 제작이 어려워지면서 덴마크 미술의 전통이 무너지게 된다. 교회의 주문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수많은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활동이 어려워졌고, 왕실과 귀족들의 초상화 등을 독일 등지에서 온 화가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덴마크 미술은 혹독한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미술의 발전에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은 1754년 덴마크 예술 왕립 아카데미가 설립되면서 부터다. 왕립 아카데미는 덴마크 미술 교육의 중심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덴마크만의 느낌이 깃든 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를 탄생 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세기 초부터 덴마크는 예술의 황금기로 불리는 ‘골든 에이지’를 맞이했다. 1800년부터 1850년까지 약 50년 동안을 일컫는 이 시기에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문학과 철학, 과학 등 수많은 영역들이 함께 발전했다. 그러나 나라 안팎의 사정은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에는 덴마크-노르웨이 왕정이 몰락했고, 두 번의 큰 화재 때문에 코펜하겐에 있던 수많은 건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또한 덴마크는 당시 혼란기를 겪고 있던 유럽의 세력싸움에 휘말려 영국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결과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되고 도시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찾아온 경제위기 상황은 자국 회사들의 파산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모진 풍파를 여러 차례 맞았지만 도시의 재건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 노력한 결과 덴마크는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피어났다. 도시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한 방안으로 각종 건물들은 아름다운 외관을 갖게 되었고, 도로 등 국가 기반 시설들을 재구축했다. 더욱이 산업화가 시작되어 중산층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그들의 관심이 문화 예술로 확대되자 미술 시장이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꽁꽁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새싹이 더욱 반갑고 소중하듯,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덴마크의 황금기는 그래서 더욱 가치 있고 빛나는 지도 모른다.



◇덴마크 회화의 아버지, 에커스버그

덴마크 미술의 황금기는 프랑스 인상주의처럼 혁신적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하지만 뛰어난 자국 화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고, 이웃나라들의 화풍과 덴마크에서 찾을 수 있는 소재가 섞이며 덴마크풍의 미술을 만들어낸 중요한 시기라고 여겨진다. 이 시기의 회화는 풍경화와 가구 같은 실내 장식이 돋보이는 그림, 소규모 그룹 초상화 등이 주를 이룬다. 그림들은 대체로 부드러운 느낌을 지니고 있지만 강렬한 색채의 대비가 매력적이다.

황금기를 이끌었던 중요한 화가로 크리스토퍼 빌헬름 에커스버그(1783-1853)를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에커스버그는 덴마크 미술에 진한 색채를 선사한 ‘덴마크 회화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에커스버그는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 재학 중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유학 했다. 특히 파리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신고전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이탈리아로 건너가면서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물들을 마주하며 영감을 받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과 화풍을 접한 에커스버그는 덴마크로 돌아와 자신만의 색채와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중산층의 초상화와 풍경화를 주로 그렸던 에커스버그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고, 그들 역시 스승을 따라 덴마크 미술의 황금기를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에커스버그는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게 되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에커스버그가 중심이 되었던 황금기의 작품들은 그림을 ‘구경’하는 재미를 준다. 그림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주제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옷, 국기, 실내 인테리어,항구의 풍경 등은 덴마크의 감성과 그 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기도록 해준다. 결코 화려하진 않지만 덴마크 화가들의 색채 속에는 여운을 주는 깊이가 묻어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감정이 녹아 들어 있다.



◇그리고 국립 미술관

덴마크 미술의 발전과 역사를 그림을 통해 직접 느껴 보고 싶다면 국립 미술관만 한 곳이 없다. 이곳은 14세기부터 현대 작품을 아우르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시실은 덴마크 출신화가들과 북유럽 미술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미술관의 컬렉션은 유럽 대부분의 미술관이 그러하듯 덴마크 왕실 소장품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당시 군주였던 프레데리크 5세(Frederik V)는 왕실의 미술품이 다른 유럽 왕실의 소장품보다 여러 면에서 뒤떨어진다고 여기고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구입하여 컬렉션을 확장했다. 작품들은 1884년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화재로 갈 곳을 잃었다가 1896년에 국립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새 보금자리를 찾게 되었다. 1993년 미술관이 확장되면서 근현대 덴마크 출신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전시하여 덴마크 미술의 흐름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주소: Sølvgade 48-50 1307 Copenhagen K

운영시간: 화~일(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 휴관

입장료: 성인 120DKK(한화 약 2만2000원) 18세이하 무료

홈페이지: https://www.smk.dk/



 
Christen Koebke (1810-1848), Udsigt fra Dosseringen ved Sortedamssoeen mod Noerrebro, 1838
Wilhelm Bendz (1804-1832), Familien Raffenberg, 1830-12-06
 
C.W. Eckersberg (1783-1853), Udsigt fra Kronborg Vold over flagbatteriet og Sundet til den svenske kyst, 1829
C.W. Eckersberg (1783-1853), Mendel Levin Nathansons aeldste doetre, Bella og Hanna,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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