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국립진주박물관
[경일칼럼]국립진주박물관
  • 경남일보
  • 승인 2021.05.0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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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 (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상평통보를 조각한 새즈믄 거리가 끝나 공북문이다. 진주성은 고려 말 우왕 5년(1379)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2002년 공북문 복원공사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북문 안내소 오른쪽 성멱 하단에 명문 벽돌이 있다. 1680년 진주성을 개축할 때 축성 작업 담당을 표기한 것으로 康熙十九年 山陰馬兵中哨 泗川 昆陽 河東 丹城 咸陽 六官一哨(강희 19년 산음 마병의 중초인 사천 곤양 하동 단성 함양 등 여섯 개 관할 구역이 한 개의 초를 이루었다). 이는 실명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이다. 돋보이게 꾸며야겠다!

공북문을 지나면 내려다보며 명령을 내리는 장군상이 있다. 나들이 나온 가족이 다가간다. 열심히 적고 있는 자녀에게 가장이 忠武公 金時敏 將軍像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이구나. 충무는 시호이며 무(武)로써 공이 많은 사람에게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이며 공(公)은 주로 남자의 성이나 성명 뒤에 쓰여 그 사람을 높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이란다. 충무공을 한산도대첩의 이순신 장군으로 알지만 김시민 장군은 진주대첩을 이루어낸 영웅이란다. 진주시에 충무공동이 있다.”

동상 아래 나란히 안내판이 있다. 하나는 ‘진주대첩 이야기’를 10장의 만화로 펼쳤는데 3번째는 조선군 3800명 VS 일본군 3만명, 8대 1의 전투가 시작된다. 7번째 컷은 김시민이 일본군의 침략을 대비하여 염초(화학연료) 150근과 총통 170자루를 제작하였다. 두 번째 안내문은 목사 김시민은 임진년 10월 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명의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라고 오석에 새겼다.

진주대첩의 아군 병력은 공히 3800명이고 일본군은 2만명 또는 3만명이라 1만명의 차이가 있다. 김시민 장군 시호를 충무라고 당당하게 자녀에게 말할 수 있지만 병력수의 질문에 ‘연구하여 답하겠다’고 해야겠지.

국립진주박물관은 월영산(月影山) 동쪽 자락에 위치한다. 기와지붕을 첩첩히 겹친 모양새이며 임진왜란 전문역사박물관이다.

진주성의 수성 요인은 화약과 총통을 사용한 것이다. 조총은 한방 쏘고 조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총통은 엄청난 소리와 파편이 날아 적을 혼비백산시키고 아군의 사기 진작에 효과가 높고, 수류탄에 해당하는 질려포는 개인 무기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총통의 구조와 발사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숫자로 본 임진왜란’이라는 상황판은 뛰어난 전시방법이다. 키의 비교에 조선 남자 161㎝ 여자 148㎝, 일본 155㎝, 미국 173㎝. 인구는 조선 700만에 일본은 1500만이다. 일본군은 전공을 인정받기 위하여 코를 베어갔는데 교토 코 무덤에 묻힌 조명 연합군 코는 21만4752개이다. 특히 당시 조선 남자는 귀걸이를 했기에 조선 병사의 귀를 베어갔다. 일본에 있는 귀 무덤과 전쟁은 쌍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교훈으로 풍신수길 아들의 비참한 최후도 덧붙이면 좋겠다. 그리고 침략군의 선봉장 소서행장의 말년은 안녕했을까.

임진왜란에 명이 쓴 은의 양은 2000만량 이상이며 명군 1명의 하루 식사량은 쌀 15컵이며 조선이 부담했다. 군량미가 부족할 때 조선 병사 1일 최소 식량은 쌀 10컵 정도이라니 백성의 굶주림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명군 전마 1일 사료 보급량은 콩 3말 마초 15근이다. 일본이 포르투갈 노예 상인에게 팔아넘긴 조선인 1명당 책정된 값은 쌀 2가마니였다. 임진왜란으로 1결당 쌀 생산량은 300석(48t)에서 225석(36t)으로 감소되었다.

진주대첩은 조총으로 무장된 대규모 적과 아군의 화약을 이용한 병기, 지략, 민관군·승병의 일치된 수성 결의와 외곽 지원의 결과이다. 적이 토성을 쌓자 현자총통을 쏘아 무용지물로 만들고 시한폭탄에 해당하는 비격진천뢰에 기겁하고, 대나무 다발로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에 걸쳐 성안으로 조총을 쏘자 화살 끝에 화약 주머니를 매단 차대전, 질려포로 대응하며 성 밑에 수북이 쌓아둔 솔가지에 화약을 종이에 싸서 던져 불태운다.

월영산 서쪽 자락에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승병의 넋을 기리는 호국사와 충무공 김시민을 포함한 39신위 및 칠만민군관 신위를 모신 창렬사가 있다. 국립진주박물관과 연계하는 교육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안명영(수필가·전 명신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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