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영 (시인·마루문학회장)
글을 쓰며 늘 대하는 고민이다. 체면(體面)이 무얼까 하는 고민 말이다. 생각 없이 등장하는 힘겨운 기질의 이 단어는 유래를 알 길이 없으나 비단 우리 민족만의 기질은 아닌듯하다. 한자문화권에서 공유하는 단어들에서 비슷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꽤나 깊은 역사를 지닌 글자임에는 틀림없는 동양적 관습은 아닐지. 대체로 얼굴을 뜻하는 단어로서 안면(顔面)이 등장하면서 체면은 겉치레의 외향적 행태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듯하다.
오래전 일이다 목욕탕에서 한 선배를 만났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그 선배는 중형 차로 가더니 씨익 웃으며 인사를 하고 차를 타는데 공손하게 인사를 건넬 뿐 떠날 때 까지 배웅을 멈추지 못했다. 그 선배는 나를 공손하다 여겼을지 모르지만 사실 내차가 경차라 타지 못하고 내 차가 아닌 양 그 선배가 주차장을 다 빠져 나간 후에야 차에 올라 개운치 못한 감정으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체면의 궁극은 무얼까. 경차로 나타난 내 경제력 왜소함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던가. 겉치레 탓에 주저하여 멈춘 일들이 셀 수 없이 많고 체면 탓에 스스로에 면목 없는 후회도 수없이 많다. 그러고 보니 면목(面目)도 얼굴에 관한 단어이다. 초한지의 항우의 말에서 유래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오강에 이르러 오강의 정장이 배를 대놓고 후일을 도모할 것을 권하자 “강동의 부형들이 동정하여 왕으로 삼아 준다 하여도 어찌 면목으로 그들을 볼 것인가”(我何面目見之)며 자결한 일로 생겨난 말이다.
여기서의 얼굴인 면목은 염치이다. 염치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서민이 살려면 체면을 버려야 하겠지만 지도자는 체면을 차려야 한다. 최근 죄를 묻는 장차관 검찰의 주요 수장의 면목 없는 체면 구길 일들을 목도하고 체면과 면목의 어딘가에서 부끄러움을 잃은 지도자의 모습에서 코로나보다 더한 고통을 느낀다. 안채영 (시인·마루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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