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54] 섬 (손미경)
[강재남의 포엠산책 54] 섬 (손미경)
  • 경남일보
  • 승인 2021.06.06 15: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툇마루 아버지는 섬이 되어 그곳에 계셨다
 

별똥별 하나 떨어져 아버지 입에 물려있다

깜박깜박 안개가 섬을 둘러싼다


발걸음마다 벼랑이던 젊은 날

아버지의 칼바람 같은 말에 서러워 잠든 날들

또닥또닥 새벽녘

아버지는 시린 청춘 누인 내 방 아궁이에 군불을 넣고 계셨다

등은 더 시려오고 속은 데워져 잦아들었다


섬에 떨어진 별은 기력이 쇠했다


유일한 위안이던 담배도 끊고

입에 물었던 불호령은 돌담 이끼로 말라갔다

밭고랑 같던 손가락이 하나씩 지워지고

흐릿한 눈빛에 내가 담긴다

차마 다가가지 못했던 그 섬에 다리가 놓인 것은

한 녀석은 어미 되고

한 녀석은 아비 되고

바다의 울음이 들리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뭍으로 오고

돌아보니 내가 그 섬이 되어간다

 
걸음을 떼면서부터 오후가 되면 아버지 손을 잡고 신문을 받으러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요. 섬에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객선(客善)이 뜨기 때문에 조간을 석간으로 받아보던 시절이었죠. 아침마다 마을 회관에선 새마을운동 노래가 울려 퍼지고 노래 소리가 커지는 만큼 마을길도 넓어졌지요. 채 길이 되지 못한 자갈밭은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서 마을 어른 누구라도 언니들을 업어서 학교 가는 길을 건너 주곤 했어요. 불편한 그런 일을 불편한 줄 모르던 행복한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의 아버지는 신문을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글자를 읽어주었죠. 그러다가 바다사업이 망하고 아버지는 변해갔습니다. 웃음이 많던 얼굴은 굳어 있었고 푸른 바다가 출렁이던 가슴은 절망이 배어있었죠. 아버지는 툇마루에 앉아 노쇠한 섬이 돼버린 겁니다. 발걸음마다 벼랑이던 젊은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 같은 아버지를 보고 있었나 봅니다. 시린 청춘 누인 자식의 방에 군불을 지피던 아버지는 이제 어디로 간 걸까요. 육신은 그대로 섬이 되고 영혼만 뭍으로 올라와 있는 걸까요. 돌아보니 내가 섬이 되어 간다는 말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화자에게 오버랩된 독자의 마음이기도 해서일 것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