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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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1.06.1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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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동화작가 한수연의 수필집과 작가로서의 중량(1)
동화작가 한수연은 195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고 마산교대를 졸업했다.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에 ‘바람골 우체부’가 당선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초등교사를 그만 둔 어느 시점, 통영에서 진주로 이사 나왔는데 천주교 신자로서 작가의 부군과는 필자와 자주 만났다. 그 사이 한 작가는 교직에 다시 복직하고 정년까지 거쳤으니 세월이 꽤 흐른 셈이다.

한 작가는 198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서 ‘항아리 소묘’로 당선이 되어 동화와 수필 양장르에 부지런히 오갔을 것이다. 삼현여중 박재두 교장이 언젠가 ‘한수연의 수필’을 주목해 볼 것을 내게 권했다. 그는 통영의 ‘수향수필’ 멤버로 자주 그 수필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재두 시조작가는 평소 수필 장르를 눈여겨 보지 않는다 하여 수필가들에게서 눈총을 받고 있었다.

필자는 모처럼 한수연 수필을 받고 수필 읽기의 재미에 빠질 수 있었다. 한수연의 수필집 ‘삶에 무늬를 더하다’의 ‘작가의 말’에서 먼저 매력이 잡히기 시작했다.



마음 한 곳에 말들이 살고 있었다. 말들은 잠들지 않고 내 수면 위로 떠다닌다. 알약을 삼켜도 잠들지 않는 말들의 말. 말들을 잠재우기 위하여 산문집을 낸다. 집(集)이 생기면 잠들겠지 하고.

말들은 집을 찾아가다 길이 끊어지고 징검다리 건너다가 발목을 적시기도 하며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말들이 걸어온 길이 내 삶의 무늬가 되었다.

서툰 목수지만 밤이면 별들이 찾아오게 창문 하나는 달아주고 싶다.



작가는 잠들지 않는 말들을 위하여 말을 쓴다. 필자는 이번 수필집에서 특히 ‘도라지꽃’에서 그 질감에 깜짝 놀랐다.



‘웃음을 참고 있는 꽃, 도라지.’

이것은 소녀시절의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구절이다. 텃밭에 유달리 도라지를 많이 심었던 시골 친척집에서 보낸 여름 한 철, 나의 하루는 이 도라지꽃 꽃망울과 함께 열렸다. 하양과 어울린 보라의 꽃망울 속에 서서 출석을 부르는 선생님 같은 얼굴로 꽃들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바로 오늘 꽃망울을 틔울 꽃들을 가려낸다. 이것은 도라지꽃 속에 서서 며칠만 지내보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나와 꽃들만의 약속이다.

“너는 모레라야 눈뜬단다. 오, 너는 내일 아침에......”

작은 망울을 빨리 열고 싶어 하는 꽃들에게는 어느새 이런 속삭임까지 곁들이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꽃망울을 넣고 살그머니 누르면. 팡! 하고 터지는 도라지꽃의 그 맑고 고운 웃음소리, 도라지꽃의 정결한 웃음 하나로 내가 바라보는 아침까지도 청량해진다.



이어서 한수연 수필은 이어진다.



도라지꽃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고 있는 부끄러움 많은 시골 처녀 같은 모습이다. 도라지꽃을 시골처녀 같다고 생각한 것은 그 시골집에 꼭 도라지꽃 같은 내 또래의 처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두어살 위인 그녀는 외길에서 남자나 어른을 만나면 길 한 쪽으로 비켜 서서 그가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살그머니 수그리고 서 있었다. 가슴께를 여미며 고개를 수그린 조신한 몸가짐, 나에게조차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입안으로 삼키듯이 조용히 웃던 모습…. 나는 도라지꽃 망울을 열면서 어쩌면 그녀의 웃음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된장을 뜨러 장독간에 나온 그녀의 옷자락이 보이면 소년 같은 심술로 그녀를 붙들었다. 그녀에게 들으란 듯이 도라지꽃 망을을 열면서 소리쳤다. “웃어라, 웃어라”하고.

나의 이 철없는 짓거리를 그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든 채 바라보고 서 있곤 했다.

그 처녀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면 꼭 도라지꽃이 망울을 터뜨리는 그 정결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라지꽃은 꽃망울을 다물어도 활짝 열어도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는 부끄러움 많은 시골 처녀 같은 모습이다.



도라지 속에서 부르고 대화하는 사이, 부끄러워하고 웃고 있는 모습이 고결해 보인다. 뒷단락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 정도에서 보아도 수필은 하나의 격을 얻고 있다. 필자는 보는 즉시 교과서에 들어갈 수 있는 수필이라 여겼다. 작가는 소년한국일보 김수남 선생님이 작가에게 말해준 말도 그 교과서 글이었다고 전한다. 좋은 글은 누구에게나 좋은 글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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