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갑 (한국선비연구원 사무처장)
1553년(명종 8년) 퇴계선생이 남명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임금이 성스러워 육품직에 서임하는 은전을 내리시니 군신간의 윤리를 저버리지 말고 조정에 나오라”는 애정 어린 권유였다.
남명의 답신은 이러했다. “자신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세상을 속이고 있을 뿐이며 다리를 절게 되어 잘 걷지 못하고 눈병이 나서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발운산(안약)을 구해 제 눈을 밝게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명선생은 72세까지 사셨고 편지가 오간 53세 때는 학문적, 신체적으로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기에 눈병으로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이는 12살 어린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외삼촌인 윤원형의 그릇된 정치가 극에 달했던 명종시대에 임금이 내리는 특전을 눈병을 핑계로 거절하면서 내가 보는 조정은 그렇지 않은데 퇴계선생이 임금과 조정의 덕을 이야기하니 내 눈이 잘못 된 거라면 안약을 보내 고쳐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한 퇴계선생의 답신은 이러했다. “저 자신은 당귀(當歸)를 찾는데도 얻지 못하니 어찌 공을 위하여 발운산을 모색해 보겠습니까? 공은 북쪽으로 올 뜻이 없지만 나는 조만간 남쪽으로 갈 것입니다.”
만약 남명선생이 벼슬에 눈이 멀어 백성의 지탄을 받는 조정에 가벼이 나아갔다면 태산준령 같이 울림이 큰 단성소를 어찌 역사에 남길 수 있었겠는가?
또한 선비들의 목숨을 쉬이 여긴 서슬 퍼런 정권에 눌려 목소리를 죽여 가며 은인자중하던 선비사회가 남명의 단성소가 없었다면 어찌 다시 깨어나고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남명은 벼슬을 받지 않음으로써 꿋꿋함을 유지했고 왕이 아닌 나라와 백성의 편에 남아 선비사회의 표상으로 밝은 빛이 되었다.
‘안약과 당귀’로 상징되는 이 편지들을 통해 나아갈 때가 아님을 직시한 남명의 시대적 상황인식과 조정이 어지러울 때 낙향을 선택했던 퇴계의 출처관(出處觀)을 유추해 보면서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는 대통령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품격 높은 사상과 정신을 알고는 있는지 안타까운 가슴을 쓸어내 본다.
박태갑 (한국선비연구원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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