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갑 (한국선비문화연구원사무처장)
산청군 덕산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사상이 오롯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현장으로 선생의 만년인 1561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11년간 임진왜란 3대 의병장을 비롯한 56명의 의병장과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한 실천유학과 구국의 산실이다.
선생이 61세의 늦은 나이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마지막 터를 잡으신 것은 왜일까? 산천재 건물의 기둥 주련에 걸린 시와 함께 천정에 그려진 세 점의 벽화를 보면 460여년전 시대를 관조한 남명의 사상을 유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명리를 떠나 안빈낙도하는 삶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경치 좋고 편안한 거처로서의 의미를 넘어 천왕봉에 가까운 곳에서 천리를 받들겠다는 의지와 기개가 선생의 결단이었고 그것이 잘 드러나는 두 번째 구절이 이 시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세 점의 벽화를 통해 선생의 사상과 출처관(出處觀)을 상상해 보자. 먼저 중앙 천정에는 진시황제의 폭정에 산속으로 은거했던 네 명의 현인(賢人)을 그린 ‘산상사호도’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堯(요)임금 때 은사인 巢父(소부)와 許由(허유)의 고사를 그린 그림으로 임금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들은 허유가 냇물에 귀를 씻고 있는데, 소부가 허유에게 귀 씻는 연유를 듣고, 그 귀를 씻은 물을 자기소에게조차 먹일 수 없다며 상류로 올라가 버리는 ‘허유소부도’가 있다. 왼쪽벽화는 요순의 도를 구현했다고 전해지는 명재상 이윤(伊尹)의 고사를 그린 ‘이윤경신도’라는 그림으로 탕임금이 초야에 묻혀 있던 이윤에게 최고 실권자인 재상자리를 맡겨 나라와 백성을 편안히 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세상의 도를 터득한 선생께서 산상사호도나 허유소부도의 은자(隱者)와 같이 정치적 뜻을 펼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처절한 고민과 함께 이윤에게 실권을 주어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은 탕 임금의 시대를 희구하면서 비록 처사의 신분이지만 나라와 백성을 늘 가슴에 품고 목숨을 걸고 왕과 조정을 꾸짖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정신이 더욱 송연하게 다가온다. 마음이 흔들리고 헛헛하면 산천재에 한번 와 보시라! 태산 같고 우레 같은 남명선생의 기개가 지금도 온전히 산천재에 남아 천왕봉을 향하고 있다.
박태갑 (한국선비문화연구원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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