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 58]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이승희)
[강재남의 포엠산책 58]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이승희)
  • 경남일보
  • 승인 2021.08.0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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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쯤에서 꽃 무더기라도 필 생각인지 새삼 잊었던 기억이 몸이라도 푸는지 녹색의 살들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서 팽팽해지는 오후 녹색의 말굽들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횡설수설 나를 잡아당긴다 슬플 겨를도 없이 구석을 살아온 내게 어떤 변명이라도 더 해보라는 듯 여름은 내게 베고 누울 저승을 찾으라 한다 구름 사이로 모르는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다 누구의 유족인가 싶은데 문상 차림치고는 너무 설레는 표정이다 큰 나무 뒤에서 혼자 늙어가는 개복숭아는 제 식구들을 욱욱 게워내고 있다 다 늙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엇을 먹는 건지 게워내는 건지 나는 못 본 체 지나간다 그렇게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어디쯤에서 그늘을 오려내고 그 자리에 숨어 이 계절을 지나가야 하는지 오려낼 자리마다 더 깊은 변명이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썩어가자고 엎드려 울기나 하자고 이 세상 모든 꽃이 유족처럼 나를 향해 필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사연을 말하지 않으려는 중이다
 

 



폭염주의보가 부고장처럼 날아드는 날의 연속입니다. 쏟아지는 땡볕에 녹색의 살들은 대책 없이 흘러내리고요. 예민한 촉수를 가진 모든 것이 팽팽해지는 여름입니다. 슬픈 일이 커서 이런 모든 것이 귀찮아지는 여름이기도 하고요. “어느 시인은 여름이 좋다고 했다. 거짓말 같았다” 말하던 사람은 스물다섯 해를 지구에서 머물렀어요. 그리고는 다음 해 여름에 거짓말 같이 본인의 행성으로 떠났지요. 유난히 여름을 좋아하는 시인을 좋아한 어린 시인은 정작 여름이 싫어 여름에 떠났습니다. 여름은 거짓말과 동의어가 아닐까 잠깐의 생각에 빠져봅니다. 그러면서 문상 차림치고는 너무 설레는, 나도 그런 사람이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혼자 늙어가는 개복숭아는 제 식구들을 게워내기라도 하는데 게워낼 어떤 것도 없는 나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오려낼 그늘도 엎드려 울 곳도 없이 꽃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나는 어떤 여름일까요. 세상 피는 모든 꽃이 유족이면 이 캄캄한 사연을 다 말할 수 있으려나요. 그리고 그 다음 여름에게 좀 더 친절해질 수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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