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바야흐로, 배롱나무꽃의 계절이건만
[경일춘추]바야흐로, 배롱나무꽃의 계절이건만
  • 경남일보
  • 승인 2021.08.0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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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사천시의원
 
 


“귀 밝은 개가 벼 자라는 소리 듣고 짖는다”는 입추가 지났다. 하지만 폭염은 꺾일 기세가 없고 배롱나무꽃들은 천지간에 제 향기와 꽃빛을 터트리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 붉은 꽃 없다지만, 배롱나무꽃은 7월부터 9월까지 백 일 동안 핀다. 그래서 ‘백일홍’이다. 절집과 누정, 서원 등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는다. 고혹적인 꽃빛조차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선현들의 곁에 두고 아꼈던 나무! 독특한 역사와 문화적 스토리를 담고 있는 배롱나무가 언택트 시대의 힐링콘텐츠가 되고 있다.

강진 백련사와 화순 만연사, 서산 개심사, 공주의 갑사 대적전 앞 배롱나무, 고창 선운사, 달성 도동서원 배롱나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가깝게는 산청 덕천서원 솟을 외삼문 앞 배롱나무와 대원사 극락보전 앞 배롱나무와 실상사 흰배롱나무 또한 고결한 기품을 자랑한다.

고려 말 모은 이오(茅隱 李午)선생의 불사이군을 상징하는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600년 세월을 견뎌온 자미단(紫薇壇)과, 모은의 증손 이포(李咆)공이 김해로 솔가하면서 심은 ‘관천재’의 500년 배롱나무, 부산 양정 동래정씨 집안의 수령 800년 된 배롱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렇게 많은 배롱나무 중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의령 유학사 배롱나무이다.

2007년 뜨거운 여름날로 기억한다. 가깝게 지내던 시인 몇 분과 의령 유학사 ‘산사 음악회’에 갔었다.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려가며 유학사 배롱나무와 비구니 스님에 대해 소략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녹음이 짙은 미타산 자락의 유학사 경내에 들어섰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250살 잡수신 극락전 앞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마치 금강장사처럼 아미타불을 호위하듯 피고 있었다. 흰꽃과 선홍빛 두 그루 고목이 꽃의 울창을 이룬 꽃물결의 파장은 나의 혼을 빼놓았다. 그때 조우한 유학사 흰배롱나무는 ‘편식주의자인 사내의 불길한 애인’이 되어 필자의 졸시 (연애)로 필사되었다.

여러 해를 보내고 2년 전, 유학사 배롱나무꽃을 보러갔다. 그 사이 주지스님도 바뀌고, 한여름의 산사를 찬란하게 빛내던 배롱나무는 몸통만 남아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필경 까닭이 있었겠지만 나무 한 그루가 사(寺)격이 되고, 문화이고, 스토리자원이 된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텐데…. 바야흐로 배롱나무꽃의 계절이건만, 유학사 배롱나무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김경숙 사천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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