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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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1.08.1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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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 사천을 노래한 현대시인들의 노작들(2)
삼천포 시인들은 1960년대 이후 박재삼 시인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같이 모였다. 시인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박재삼의 친구들 인척들도 길가에서 만나 한참은 서성이며 할 이야기는 다했다. 박재삼은 일본에서 1933년 출생하여 귀국해서는 삼천포 최고 횟집식당 ‘미찌집’ 아래채에서 컸다.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시절 식당집 아래채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필자는 늘 그것이 생각났다.

박재삼은 한려문화제 같은 향토 문화제에 초청받아 내려오면 주최측을 만나는 순간 진주에 사는 10년 정도 후배였던 60년대 시인 트리오(박재두, 김석규, 강희근)를 전화로 불러 같이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 때 선구동 2층 술집 ‘목섬’에서 술 한 잔에 유행가 한 곡을 불러야 했다. 그 사이 토박이 시인 최송량 시인이 “재삼이 성님!” 하고 2층을 용하게 찾아 올라왔다. 그날 이후 박재삼만 떠올리면 ‘재삼이 성님’이라는 호칭이 선구동이나 필포동 골목길에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송량은 시도 성님 시를 닮는 듯했다. “봄이 오는 한려수도/뱃길 삼백리//동백꽃 피는 사연/ 그곳에 서려/ 겨울 지나 봄이 오면/시랑이 피는/사랑섬 건너오는 새파란 바다// 갈매기 두세 마리/한가히 나는// 노산 끝 신수도엔 /노래미가 한창인데// 와룡산 숨어 피는 /진달래꽃은// 피를 토해 붉게 물든 수채화 한 폭” (최송량 삼천포 아리랑)

최송량 시인은 형님 시인을 믿고 ‘삼천포 아리랑’을 가락 좋게 뽑아내는 것일까? “노산 끝 신수도엔/ 노래미가 한창인데” 노산, 신수도에서 노래미로 넘어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넘어치는 도리깨 소리가 나는 듯하다. 최시인이 작고하기 전에 필자를 보고 “성님 묘소를 공주애서 옮겨 와야 하는데…” 하고 스스로에게 다지는 투로 말했었다. 이후 소식은 모른다.

삼천포 노산공원에 ‘박재삼문학관’이 서서 아지랑이 철엔 눈물겹다. 박재삼 시인이 학비가 없어 중학교를 못가고 노산에 올라 시간을 보내며 중힉교 운동장을 건너다 보았다는데 그때 눈에 어렸던 눈물이 깎지끼어 벽돌로 쌓인 것일까.

벌써 몇 년이 흘러 갔을 것이다. 단국대학교 김수복 시인(현재 동 대학교 총장)이 박재삼문학관 작가실에 일주일 입주했다가 “내일 나가는데 한 번 오시어 차나 한 잔 하시지요” 하던 때가 그렇게 가물거린다. 아마도 이때 김경 시인이 관장으로 작가실을 확장했던 것일 터이다. 박재삼 시인이 노산과 바다를 좋아하는 시인들을 불러 조용히 글을 쓰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문학관도 운영의 묘가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박재삼문학관 전시실 한 코너에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한 고등학생의 담임 선생이 친구인 박재삼시인에게 보낸 학생을 소개하는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그 학생은 정삼조 인데 문재가 있어 부탁하는 편지글이었다, 거기에 대한 답장으로 박재삼의 친필이 왔다. 내용은 시인이 되려면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초지일관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학생에게 잘 주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정삼조는 대학을 박재삼이 다니던 고려대학 국문과에 갔고 현대시학으로 등단했고 경상국립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 시인은 ‘선진리에서’를 썼는데 결별의 아픔을 느긋이 표현하고 있다. “그대 떠난 후 벌써 몇 년이나/이곳에 오면/ 그대와의 결별이 새롭다네// 이곳의 이름은 선진(船津), 배 들고 나는 나루터이니/ 사람 보내기 좋은 물가/ 인연의 끈을 잠시 놓기 좋은 곳 아닌가// 더구나 이곳은 옛 전쟁터/ 죽고 삶이야 항용 있는 것이지만/ 유독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여기는 떠남이 많은 곳이라네// 승리가 있고 패배가 있었다 하나/ 남은 것은 큰 무덤 하나와/ 바람소리 뿐이라네 (중략)/ 그대 떠난 지 몇 년/ 그대는 벌써 떠났어도 / 나는 여기 오면 생각한다네/ 여기는 사람 보내기 좋은 곳이니/ 올 때마다 그대를 새로 결별한다네”

선진리는 배 떠나고 돌아오는 곳이라 사람 보내기 좋은 곳이라 여기만 오면 결별한다는 것이다. 거기다 사천에서 가장 벚꽃이 많이 피고 만발하는 명소이니 결별도 명결별이 된다는 것인지 모른다. 필자의 친구들이 어느날 벚꽃 피는 날을 잡아 하루를 보내다가 떠나는데 친구를 이곳에 남겨두고 가는 것 같아 사천 선진이야 말로 뭔가를 두고 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 마디씩 던졌다. 저녁해가 아쉽고 바다가 아쉽고 노산과 짝을 이루는 등성이가 아쉽다는 것이다. 필자는 친구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깨 하나에 한 ‘톡’씩 두드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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