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한국판 ‘노블레스 말라드’
[경일시론]한국판 ‘노블레스 말라드’
  • 경남일보
  • 승인 2021.08.30 1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교수
프랑스와 영국이 100년을 맞서 싸운 이른바 ‘백년전쟁(Hundred Years’s War)’이 끝날 무렵 도버해협의 항구도시이자 프랑스의 요충이었던 칼레(Calais)가 영국에 함락됐다. 칼레시장은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사절단을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보내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단호했다. 감히 대영제국에 덤빈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칼레 시민의 목숨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대표 6명만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칼레 시민들은 과연 누가 먼저 목을 내놔야 할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시가 온통 긴장과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칼레시의 가장 부자였던 ‘생피에르(St Pierre)’가 맨 먼저 교수형을 자청했다. 이어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들이 줄줄이 나섰다. 그들은 처형을 받기 위해 스스로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자 지도자급 6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는 형을 집행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사면했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탄생했다. 이는 곧 서구사회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도덕의식은 계층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미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만만치 않다. 엄청난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 당시 미국 참전용사중 142명이 미군 장성들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많은 것을 받는 사람은 많은 책무가 요구된다(Much is given, much is required).”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196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한 말이다. 미국 최대의 할인유통매장인 ‘월마트’창업주는 대를 이은 근검절약 정신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샘 월턴은 유통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됐지만, 자녀들에게는 가게에 나와 일한 만큼만 용돈을 주고 자신도 낡은 트럭을 손수 몰고 다녔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되고 있다. 실제로 1,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가. 사회 고위층 인사나 상류계층의 병역기피가 오래된 병폐로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오너 리스크(Owner risk)’에 대한 여론의 준엄한 심판은 일부 대기업 경영진의 ‘갑질 사건’에서 불거져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이용하여 세도를 부리는 행위인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는 없는가. 프랑스어로 귀족이나 기득권자를 뜻하는 노블리스와 아프고 병든 상태를 뜻하는 말라드의 합성어로 기득권 세력이 힘을 믿고 각종 부정부패를 저리르는 행위를 말한다.

최근 일부 권력자와 정치인의 자녀 입시 부정 의혹과 부동산 문제에 대처하는 정치인들의 ‘내로남불’과 염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위선적 주장들’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허탈감에 빠졌을까. 보도가 사실이라면 기득권 세력과 권력자들의 자기 자녀에 대한 ‘스펙 부풀리기’, ‘인턴 품앗이’, ‘명문고 유학반’ 등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입시전문가들과 외고 졸업생들에게 물어보면 유학반은 ‘금수저’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한국의 ‘노블레스 말라드’를 더 말해 뭘 하겠는가.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