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거지의 밥상
[경일춘추]거지의 밥상
  • 경남일보
  • 승인 2021.10.04 17:2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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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시인, 수필가)
 



“엄마, 거지가 또 왔어” 나는 잔뜩 부은 얼굴로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시는 엄마에게 다가가서 거지가 왔음을 알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거지들이 매일 한두명씩 찾아왔다. 그 중에는 ‘평양 천재거지’라는 별명을 가진 거지가 있었는데, 이 거지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 출근을 했다. 사시사철 두툼한 헤진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수년째 씻지 않았는지 덕지덕지 때가 끼어 있어 만지면 각질이 툭 하고 떨어질 것 같았고, 머리는 까치집을 지은 듯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게다가 실실 웃으며 입에서 뭐라고 중얼중얼 거렸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에 이 거지는 천재로 머리가 돌아서 그만 미쳐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계속 지껄이고 다녔다.

어느 날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개 집의 제삿날은 ○월 ○일, 누구 집의 환갑잔치는 ○월 ○일 등, 그는 모든 동네의 집안 행사를 낱낱이 외우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가 굶지 않을 요량으로 그러는 듯 싶었다. 한 번 들으면 잊지 않는다니, 과연 소문대로 그는 천재였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거지가 너무 더럽고 싫어서 쫓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밥이 없다고 하고 주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시곤 “정희야, 사람이 가진 것이 없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언덕을 내려다보면 보았지, 사람을 내려다보면 절대로 안 된다” 하시면서 조금 전에 우리가 먹고 남겼던 반찬들을 있는 그대로 조금씩 접시에 정갈하게 담고, 밥그릇엔 밥을 듬뿍 퍼 담아서 작은 밥상에 수저를 얹고 국 그릇 위치에는 따끈따끈한 숭늉 한 그릇을 얹어 거지에게 공손하게 갖다 주었다. “오늘은 국이 남지 않아서 숭늉”이라면서, “목마르지 않게 천천히 들어요” 하셨다. 그러면 거지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자기가 가지고 온 동냥깡통에 밥과 반찬을 부어서 담아가려고 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냥 앉아서 천천히 먹고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거지에게서 더러운 동냥깡통을 강제로 빼앗아 거지가 밥을 먹을 동안 우물가에서 깨끗이 닦아 주셨다.

엄마는 늘 이런 모습으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그냥 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차려서 대접하셨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인성(人性) 덕분에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어렸을 때부터 나도 모르게 체득(體得)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덕은 내려다보아도 사람은 절대로 내려다보지 말아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인자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이정희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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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이철 2021-12-11 10:30:23
글 읽다보니 어머님 참 인자하신 분이군요
사람대할 때 인품을 알아 본다고 하지요
너희 중 작은 소자에게 한것이 곧 나에게 한것이라는
성경 글귀가 생각납니다

우병택 2021-10-13 00:15:43
예로부터 그 사람의 인성은 엄마를 보면 알고,
그 사귐은 친구를 보라고 했답니다.

짧은 글속에서도 빛나는 어머니를 모셨으니
커다란 福 받으신 겁니다.

이제 첫 걸음이죠. 수백 회 쭉 이어질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이은자 2021-10-06 08:52:32
선생님의 밝은미소와 따뜻함은 글에서도 느껴집니다.

"거지의 밥상"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언을 선물 받았습니다.

"언덕을 내려다보아도
절대 사람은 내려다보아서는 안된다."

멋진 2021년 10월의 어느 날
선물처럼 다가온 명언을
가슴 속에 저장합니다.

이미정 2021-10-05 11:28:26
훌륭한 어머님의 가르침이 가슴 뭉클해지네요.
아이들에게도 읽히면 좋을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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