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한국어는 한글이 아니다
[경일시론]한국어는 한글이 아니다
  • 경남일보
  • 승인 2021.10.1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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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석(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화콘텐츠연계전공 교수)
 



대체공휴일 덕에 하루 더 쉴 수 있다. 대학선생인 필자에게, 거기다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생들과 만나는 필자에게 한글날은 휴일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글’이 없었으면, 아마 국어국문학과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분명 아니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즈음하여 한글을 사랑하자는 뻔한 칼럼을 쓰고자 함은 아니다. 오늘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대통령과 그의 메시지를 담당하는 연설비서관조차 한국어와 한글의 명확한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자와, 문자로 내용을 적은 글. 두 가지 모두 ‘말’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문자는 언어를 표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즉 한국어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는 한글 뿐만이 아니다. ‘annyeonghaseyo’는 어떻게 읽을 수 있나? 어렵지 않다. ‘안녕하세요’이다. 이 로마자 알파벳으로 적은 내용은 한국어로 표기한 것이 아니다. 한국어를 알파벳이라는 문자 체계로 표기한 것이다. ‘annyeonghaseyo’를 한글로 표기하면 ‘안녕하세요’가 되는 셈이다. 한편 ‘Hello’는 누가 봐도 알파벳 ‘문자’이며 동시에 영어라는 ‘언어’다. 그런데 이것을 한글로 ‘헬로’라고 쓰면 곧 한국어가 되나? 여기까지만 보아도 한국어와 한글의 의미를 서로 구분해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없이 한글이 있을 수 있을까? 존재하기 어렵다.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롭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국경일로 지정된 ‘한글날’은 사실 한국어를 기리는 날이 아니라 ‘한글’이라는 독창적인 문자 체계를 기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와 한글을 제대로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2021년 10월 9일 발표된 대통령의 한글날 경축사를 살펴보자.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소통의 언어였습니다”라는 시작 문구부터 이상하다. 물론 문장을 아름답게 쓰기 위해, 문자 체계도 의사소통의 도구이기에 넓은 의미에서 “소통의 언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썼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소통의 문자였습니다”가 맞다. 세종대왕께서 이미 밝히지 않았는가.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만든 ‘글자’가 한글이라고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어는 우리의 ‘언어’를 의미하고 한글은 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일 뿐이며, 한국어는 한글 외에 다른 문자 체계로도 표기가 가능하다. 한글은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문자’ 체계이기 때문에 저 문장에 나온 ‘언어’는 ‘문자’로 바꾸는 게 맞다. 비슷한 실수(?)가 뒤이어 또 나온다. “이제 한글은 세계 곳곳에서 배우고, 한국을 이해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언어’라는 단어의 쓰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의사소통의 도구로 바라본다면 넓은 의미에서 ‘언어’라는 말을 쓴 이유도 나름 짐작이 간다. 하지만 역시 정확한 표현은 “이제 한글은 세계 곳곳에서 배우고 한국을 이해하는 문자가 되었습니다”가 맞다. 이 경축사의 필자(대통령)는 한국어와 한글의 개념이 구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은 듯싶다. “한국어를 하는 우리의 외국 친구들”과 같이, 한국어라는 개념이 정확히 쓰여야 하는 자리에는 한국어라고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를 어색한 쓰임은 재차 이어진다. “한글에는 진심을 전하고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라는 표현. 그다음 문장은 “안녕하세요, 덕분입니다 같은 우리말은 언제 들어도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인데, 앞에서는 한글이라는 ‘문자’를 지목하고, 뒤에서는 ‘우리말’ 즉 ‘한국어’라는 ‘언어’의 따뜻함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한국어와 한글의 분명한 개념을 구분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말과 글이 같은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다름을 인지해야 한다. 한글날은 ‘한글’이라는 문자 창제를 기념하는 날이면서도,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빼앗겼던 아픔을 기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 속에서 빼앗겼던 것은 ‘한글’보다 먼저 ‘우리말’, 즉 한국어다. 한국어 없이 한글은 존재하기 어렵다. 한글날이 한국어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소중함을 다루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한글날을 기념한다면, 국가 기관과 방송 등 언론에서는 한국어와 한글의 개념을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유석(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문화콘텐츠연계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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