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일본 기시다 총리, ‘바르샤바 크니팔’을 보시라
[경일시론]일본 기시다 총리, ‘바르샤바 크니팔’을 보시라
  • 경남일보
  • 승인 2021.10.3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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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1970년 12월 7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날,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Ghetto 강제격리거주지) 추모비 앞에서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하지만 누구도 잊을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폴란드를 방문해 추모비에 헌화하던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혀 기획되지 않았고 최측근 참모들 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브란트는 이에 대해 “말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가로서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을 그와 같은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바르샤바 크니팔’이다. 독일어로 크니팔(Kniefall)은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다.

바르샤바 크니팔은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과 더불어 전후 서독 외교의 핵심 비전이었던 동방정책은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화해와 협력을 추구했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에 놓여있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선행돼야 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동유럽 전역을 침공해 점령하고 해당 지역에 큰 고통을 안겨줬다. 특히 폴란드에게는 막대한 인적 및 물적 피해를 입혔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2차 세계대전의 막을 열었고, 수백만의 폴란드인이 희생당했으며, 남은 사람들도 독일의 가혹한 점령통치를 받아야 했다. 감정의 골이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다.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을 때, 폴란드 정부가 가장 먼저 구소련에 의해 독일에 넘겨준 국경선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브란트는 폴란드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사실 독일이 영토 문제를 원상회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강대국 구소련이 제멋대로 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를 바꾼다는 것은 ‘포츠담 회담’으로 상징되는 전후 질서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패전국 독일로서는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브란트의 행동은 그가 반나치 활동을 했고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브란트의 크니팔은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어도 독일인으로서 과거 독일이 저지른 과오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또한 브란트가 독일 국민에게 보낸 메시지이기도 하다.

오데르-나이세 국경을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자 해당 지역 실향민들과 야당은 브란트를 독일제국의 영토를 팔아먹은 반역자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서독 국민에게 브란트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어가야 할 새로운 미래는 과거사에 대한 진심 어린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기시다 신임 총리에게 꼭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무릇 외교의 장에서는 치밀한 계산이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계산하지 않은 진정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때가 있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신뢰는 ‘통석의 념’ 같은 ‘립 서비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마음과 감정을 나눠야 하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가 그러했듯이….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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