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질경이 꽃 한송이
[경일시론]질경이 꽃 한송이
  • 경남일보
  • 승인 2021.11.02 15: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옥윤 (논설위원)
그 시절 기자생활은 스스로를 질책하는 자괴감과 절망이 일상이었다. 항상 사표를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권력과 독재에 맞서 정론을 다짐하곤 했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10·26에 이은 계엄선포는 신문 검열의 일상화, 5·18을 폭도로 매도하고 목숨을 건 YS의 단식농성은 ‘현안문제’로 표현하면서 행간(行間)에 사실을 숨기는데 만족해야 했다. 최루가스 자욱했던 부마사태의 학생시위는 ‘시민반응 냉담’이라며 여론을 호도했다. 불가항력이라며 자포자기,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긴 어둠의 터널은 학생들의 끈질긴 민주화요구로 벗어날 수 있었고 당시 여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국민들의 직접선거를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소위 말하는 민주화의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목말랐던 시민들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고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은 공짜 술과 공짜 식사, 무료서비스로 이날을 자축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합작한 군부독재는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됐고 이 땅에는 비로소 문민이 지배하는 민주국가, 보통사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0여년간이나 병상에 누워있던 그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아무 언론도 그의 사망에 대해 ‘서거’라고 표현하길 저어하고 ‘별세’로 표현한 것은 그의 공과가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이다. 군사쿠데타와 5·18은 씻을 수 없는 과오였던 반면 그가 이룬 6·29선언은 민주화의 거보였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외교, 주택 200만호 건설, 범죄와의 전쟁, 국민연금의 도입은 뚜렷한 치적이다. 그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 것도 이런 치적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려라)라는 좌우명은 ‘물태우’라는 별명이 붙여져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었다.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문화적 접근을 통해 국민들을 감동시켜라”는 평소의 지론이 보통사람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가 재임시절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석학 이어령은 병석에서도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의 의미’라는 시로 고인을 추모했다. 왜 하필 발에 밟히고 수레바퀴가 지나가도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는 질경이 꽃이었을까. 석학에게는 독재와 독선, 민주화라는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어렵게 핀 꽃.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가 고인의 운명적 삶으로 비쳤을까. 아니면 고정관념과 편견을 깬 그의 인생역정이 질경이 꽃을 닮아서 일까. 천학비재한 무지랭이가 알 길이 없다.

그가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곁을 떠나면서 던져준 교훈은 무엇일까. 권력은 유한하고 국민들은 좀처럼 과오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까. 공로로 과오를 덮을 수 없기에 ‘서거’가 아닌 ‘별세’일 수 밖에 없고 한평 남짓의 누울 자리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민주화선언은 비록 대통령 스스로의 과오로 단죄를 받긴 했지만 다섯 번의 대통령선거를 민주방식으로 치를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장해 온 것이다. 또 한번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 정권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다.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은 그 때의 기자생활을 추억하며 부끄러운 과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싶은 회오도 세월만큼 익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영고성쇠(榮枯盛衰)는 있는 법. 떨어져 발에 밟히는 낙엽을 보며 그도 한 때는 푸르고 싱싱함을 자랑했음을 깨닫는다.

석학은 아마도 유례없는 아사리판, 비호감의 선택, 지독한 진영간의 갈등, 유례없는 서민경제의 위기, 문화적 전환기의 회오리 바람 등 해결해야 할 난제 속에 새 대통령은 수레바퀴에 치여도 죽지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한송이 꽃을 피워낸 또 한번의 물같은 리더십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필자의 암울했던 그 시절의 기자생활도 다가올 미래로 보상받고 싶다. 고인이 용서를 빌며 세상을 떠났듯 반성과 회개는 비움의 철학이다. 2021년 가을은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계절이다.
 
변옥윤 논설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