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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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21.11.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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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개천예술제 70년 기념 창설자 이야기(1)
개천예술제를 만든 분은 파성 설창수(1916~1998) 시인이다. 개천예술제는 60년사에서 창시자 멤버를 공식적으로 8인으로 확정하고 있지만 그 창안과 기획과 추진은 스스로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성의 성격과 카리스마로 보아 추단이 가능하다. 개천예술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창시자 파성이 일제말 치안유지법에 묶여 일제의 부산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냥 편안하게 삼시 세끼 밥 먹으며 살던 사람이 갑자기 축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뭔가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개천예술제 초기에 서울에서 참여한 모윤숙이나 김광섭이나 구 상 시인 등은 파성을 ‘성주(城主)’라고 불렀다. 진주성 성주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그 스케일이 크고 국란에 대응하는 큰 인물로 보았던 것이리라. 어쨌거나 설창수는 대한독립과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하여 국중 최고의 행사를 구상하고자 했다.그렇기에 스케일이 국가단위 행사를 구상한 것이었다.

행사를 하되 국가단위로, 정신은 나라를 처음 세우신 단군조의 홍익인간에 두면서 그 조국주에게 드리는 제사상에 겨레의 천품적 예술을 봉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 국가행정은 지역단위의 사소하고 자그마한 축제를 가치로 내세우고 그런 쪽에다 지원을 더 늘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지역민들도 진주예술제라 하지 개천예술제가 무엇인가, 진주는 단군이 내려오는 길목도 아니고 거주했던 곳도 아니고 유람지도 아니지 않느냐 했다.

파성은 제10회때까지는 범위를 좁혀 ‘영남예술제’라 양보했었다. 그러나 11회부터 ‘개천예술제’로 돌렸다. 파성 자신이 국가 단위의 정신과 스케일로 잡은 이 나라 첫 번째 축제를 첫 번째 예술 문화제로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가고자 한 것이다. 필자는 파성의 그 셈법에 일찍이 동의했다. 단군이 꼭 거주하는 곳만 단군의 영역인가? 단군이 도읍을 정하지 않은 곳이라도 단군의 정신이나 의미를 먼저 깨달은 곳이 단군의 첫 번째 영역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서는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단군이 아니고 국가개념에서의 ‘개천’이다.

그럼, 파성은 왜 이 나라에서 예술축제의 제의성을 ‘개천’으로 잡았을까. 그 심리적 기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1941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칭작과에 다니던 중 북구주의 저수지 공사장에서 원치공으로 일하던 겨울방학때 파견 형사대에 연행돼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학교시절 토론에 능했던 그에게 ‘불령선인’의 딱지가 붙은 것이었다. 그는 1944년 3월 부산에서 2년 만기 출옥했다. 그는 광복이 되자 청년대, 문화건설대, 경남일보 중창간 기자, 연극운동 등 너무나 할 일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인협회 창립, 영문 발간, 개천예술제 창시 등은 자연인 파성의 활약이 아니라 나라가 없는 시절의 옥고와 눈물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원대한 지향, 국가 복구의 열원과 도전 정신으로 들끓는 용광로의 불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창렬사 백일장에서 파성은 격려사를 다음과 같이 했다. “너희는 지금 조국의 하늘 아래 백일장에 왔는데 나는 조국의 하늘이 없을 때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 했다. 너희도 앞으로 조국의 하늘이 여러분의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얼마나 고마운 공간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이 하늘에 대한 실감이 파성 시인과 필자와의 거리감이다. 파성이 개천예술제를 창시하기 직전까지의 공간을 어떻게 메꾸었는지 그 이력의 대강을 살펴 본다.

*1945년 12월 진주극장 무대에서 밤낮 3일 동안 연극 ‘젊은 계승자’(3막)를 직접 원고를 쓰고 주연하다.
*진주문화건설대 문예부장 직책을 맡다.
*1946년 3월 사천극장에서 ‘젊은 계승자’를 초대 공연하다.
*주식회사 경남일보 창간기자로 입사하여 9월에 초대 주필 취임하다.
*1946년 11월 경남일보 주최로 전재 귀환동포애를 일깨운다는 농민극 ‘동백꽃 다시 필 때’(3막 9장)를 원작 주연 지휘하여 지역 곳곳에서 공연하다.
*1947년 2월 진주시인협회 창립회장(편집 백상현, 총무 정황, 조직 백성기, 최계락 부원)
*1947년 5월 조선청년문학협회 희곡부 부원으로 들다.
*이 무렵 연극인 내지 희곡작가로 전국에 알려지다.
*1948년 2월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진주지부장에 취임하다. 구상 시인과 만나다. 이후 40년 가깝게 동기의 의를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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