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71)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571)
  • 경남일보
  • 승인 2021.11.2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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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개천예술제 70년 기념 창설자 이야기(3)
설창수 시인은 아마도 광복 이후부터 개천예술제 창설과 4·19이후 참의원 시절 그 어우름이 생애의 절정기일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고3 담임선생은 “파성 설창수 시인은 그 공적이 커 사후 공적비를 세워 드려야 할 것이다” 하고 이야기 하셨다. 그 선생님은 나중에 진주교육대학교 교수로 계시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그해 4·19가 나고 7·29총선 때의 일이다.

당시 국회가 상하 양원(하원-민의원, 상원-참의원)으로 구별해 뽑았다. 민의원 의원은 오늘의 국회처럼 소선구에서 뽑고 참의원은 경남 전체를 한 지역구로 하여 뽑았는데 설시인은 경남구에서 여섯사람을 뽑았을 때 6년제 의원으로 뽑혔다. 대단한 인기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 시골 동네 산청군 금서면 회계리 화계장터까지 와서 유세를 펼쳤다. 필자는 설창수 시인의 대중 유세의 우렁찬 진군에 매우 만족할 수 있었다. “에에. 이성계가 이 화계장터의 인근 수동면을 가로질러 황산벌(운봉)에서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지나갔는데 이곳은 그런 면에서 조선 초기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하고 역사적 배경을 풀어주었다.

유세 도중 화계장 막걸리를 한 주전자 후루룩 마신 어느 기골이 있는 장년 지도자가 “여보시오! 설창수 참의원 후보님! 인자 고만해도 당선입니더! 우리가 한다면 합니닷. 팍팍 밀어드립니더”하고 외쳤다. 그때 설후보는 “아 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산청은 물이 맑고 사람도 맑아 산청이라 하지요. 선생께서 맑고 맑은 표를 칸 안에 꾸욱 찍어주십시오.”

그런 뒤 필자는 발길도 가볍게 화계리 집으로 올라오는데 길가에 계시던 필자의 집안 어른께서 “희근아! 설창수 연설이 들을 만하더나!” “네 아주 내용이 충실하고 인기도 좋았습니다” 이 말을 신나게 하며 만족해 하는 필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야 무슨 소리 하노! 내가 듣다가 와버렸는데 조선의 아태조(我太祖)를 이성계가, 이성계가 라 말하는기 제대로 하는 것가?” 필자는 “대중 연설에서 역사적 인물을 높여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높이지 않을 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가 담기게 됩니다”하고 설명했지만 이해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

설창수 시인은 문단 인맥으로는 ‘자유문학파’에 속했다. 이헌구, 모윤숙, 김광섭, 김용호 등과 교류를 많이 했고 지역에서는 유치환, 김춘수 등과 한 동아리처럼 교유했다. 자유문학파와 대칭되는 자리에 현대문학파가 자리하고 있다. 현대문학파에는 박종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조지훈, 김현승, 박목월 등이 속했다.

설창수는 1949년 11월 3일 음력 개천절에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 뒤 연말에 시인 서정주가 문교부 예술과장 자리를 내놓게 되자 김광섭 추천으로 설창수는 문교부 예술과장이 된다. 김광섭은 자유문학파의 중심이었고 그는 제1회 예술제때 진주에 왔었다. 서정주의 경우 문교부 예술과장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 것으로 실토했다. 예술과장은 요즘으로 치면 문화관광부 일의 전부를 문교부 한 부서에서 맡았기 때문에 시인의 두뇌로는 감당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전국에 있는 문화시설 설치와 감독까지 다 문화예술과에서 책임을 졌으니 부산인가 광주인가 어디 문화예술관을 짓는데 반드시 그런 자리에는 우악스런 행동대원이 나타날 때가 많았고 사돈의 팔촌의 팔촌들이 줄을 서서 로비를 했다. 정부 수립 초기니까 그런 현상이 심했을 터였다. 서정주는 병을 빙자하여 퇴직을 했다. 그 뒷자리를 설창수 시인이 자리를 잡았으니 평소 기질로 보아 서정주보다는 강단이 있었던 설시인이 더 잘했을 것 같다. 신언서판이 서시인에 비해 설시인이 우량했으므로 웬만한 지역 어깨들도 언변으로 퇴치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시절의 설창수 시인 에피소드를 듣고 싶었는데 생전에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필자는 주량이 약해 적어도 새벽 2시까지 견뎌야 그시간부터 유흥과 진담이 화기애애 해질 것인데 저녁 9시를 정당한 시민의 활동 시간으로 잡았던 필자는 도무지 설창수 시인의 주석 스케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최용호 재단 이사장이나 박용수 시인, 라명길 교수나 강동주, 김영화 시인 등은 체력이 좋아 버티었다. 새벽 2시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설시인의 가곡 ‘동심초’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초창기 영남예술제 비사를 하나 하나씩 들려 주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최고 약점은 주량이 두 잔이라는 것, 그 어떤 회유로도 그 원칙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또 하나의 강음부가 있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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