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 과거신문을 PDF 파일로 전환한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1980년 11월 26일부터 1989년 11월 24일까지 신문이 없다.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 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집권 첫 해인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10·26, 12·12로 부상한 두번째 군사정권에 대한 언론의 평가가 호의적일 수 없었다.
전두환의 사망으로 광주에서의 헬기 사격 진실을 두고 열렸던 ‘사자명예훼손’ 항소심은 공소 기각 될 가능성이 커졌다. 1심 재판부에서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국민을 향해 헬기사격이 가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광주 민주화운동은 당시 국내 언론을 통해 거의 보도되지 못했다. 본보의 지면도 어찌된 일인지 5월 18일 ‘제9172호’ 이후 5월 21일 ‘제9174’호로 이어진다.
전두환 정권이 시작도 되기 전, 언론의 말문은 막혀가고 있었지만 이마저도 만족치 못하고 언론통폐합이라는 족쇄를 채웠다. 전국 언론사를 신문사 14곳, 방송사 3곳, 통신사 1곳으로 정리했다. ‘1도 1사’라는 말은 한사람 한사람이 매체가 되어 SNS로, 웹페이지로, 유튜브로 제각각 목소리를 내는 지금의 시대에서 보자면 눈 감고, 귀 막은 채 말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경상도의 작은 신문사였던 경남일보도 그 언론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난데없는 통폐합으로 기자들은 하루아침에 출근하던 회사에 나오지 못하고 이웃동네 신문사로 짐을 싸서 가야 했다. 일부는 다른 신문사에서 글을 쓰지 않겠다고 옷을 벗었다. 그렇게 100년 신문 경남일보 역사에 9년의 공백기가 남겨졌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 앞에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의 투쟁은 경남일보의 지면에 남아 있지 않다. 1910년대 창간기와 1950년대부터 남아있는 중창간기의 과거지면 아카이빙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 중 하나다.
윤전기를 돌리지 못했던 9년. 시민·학생들의 투쟁 속에 민주화 바람은 기어이 불어왔고 펜을 꺾어야 했던 통폐합의 울분을 풀고자하는 선배들의 복간 도전이 이어졌다. 그렇게 다시 경남일보의 윤전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 1989년 11월 26일. 32년 전 오늘이다.
한달 사이를 두고 사망한 전두환과 노태우를 두고 공도 따져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SNS에서 스치듯 보았던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스무살 꽃다운 청년들을 그렇게 죽이고, 자신은 90세 천수를 누렸다는…. 쓰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쓸 것을 써야하는 언론의 책무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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