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아버지의 30주기
[경일포럼]아버지의 30주기
  • 경남일보
  • 승인 2021.12.0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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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내 주변의 지인 중에서 나만큼 아버지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면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나와 내 아버지는 육친으로서 가깝지만, 정신적으로는 늘 멀었다. 겪어보지 못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소회라고나 할까?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가장 격렬한 중부전선의 전투 속에서 파편을 맞고 후송되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아버지는 죽기 살기로 살려고 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술을 마시고 가족을 괴롭혔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부모 찬스니 아빠 찬스니 하는 개념도 모른 채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가정에서의 지적인 언어 환경 속에서 생활하지도 못했다. 이 사실은 가장 지적인 언어를 사유하고 향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를테면 ‘생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1991년 12월 5일,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전화 연락을 받고 곧바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가까스로 열차를 탔다. 하행선 야간열차는 음력 시월상달의 그날 그믐밤 속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열차 속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눈물을 이따금 흘렸다. 이런 나를 흘깃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믐밤이어서 그런지 차창에는 산 능선의 그림자만이 얼핏 보였다. 차창은 마치 영화의 화면처럼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을 음영으로 새기거나, 늦가을과 초겨울의 능선을 힘겹게 넘어가거나 하는 환영을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삶과 죽음의 능선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 잠시 졸면서 깨어나선, 아버지, 지금 어디로 가십니꺼, 집으로 가입시더, 하고 마음으로 소리쳤다. 그 후 아버지의 그림자는 멀고 가까움의 너머 저편에서, 때로 존재하기도 하고, 때로 부재하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제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게 인간관계다. 바람과 먼지 속의 뜬 세상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 친구와 선후배와 직장 동료와 연인과 부부로서 좋은 인연을 맺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엮이고 얽힌 이들과 더불어 어쩔 수 없이 공생하면서 살아가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한껏 돕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원수처럼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면서 살아보지 못한 내 삶을 돌아다보면, 이런저런 아쉬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내게 앞으로 주어진 삶의 과제 중의 하나가 있다면, 이건 적어도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부재하는 아버지의 바람직한 상을 내 마음속에 다시 세워볼 일이다. 때마침 시를 보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아버지의 30주기를 소재로 한 산문 형태의 초고를 작성해 보았다. 시의 제목은 ‘아버지 30주기의 원근법’으로 정했지만, 말 줄이기와 행갈이는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행선 야간열차는 시월상달의 그날 그믐밤을 질주하고 있었다. 차창에 늦가을과 초겨울의 능선을 넘는 아버지의 실루엣이 어렸다. 내게 가깝고도 먼 아버지였다. 음영과 환영이 뒤섞인 아버지의 존재는 부재였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늘 애도의 원근법이 놓였다.” 아버지는 가까이에서 볼 때 낯섦이었고, 멀리서 바라보면 낯익음이었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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